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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출전(옥포 합포 적진포해전)

충무공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래 전선을 건조하고 무기를 정비함은 물론 본영 방비태세를 강화하면서 유사시를 대비하여 제반 대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던 중 1592년(임진) 4월 15일에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일본군이 부산으로 침입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결전의 각오를 더욱 굳건히 다졌다.
그 후 원균으로부터 구원요청을 받은 충무공은 몇 차례의 작전회의를 통해 부하들과 출전의지를 다지면서 조정에 출전여부를 묻는 장계를 올렸다. 당시로서는 관할구역을 임의로 이탈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4월 27일 영남해역으로 출전을 허용하는 조정의 지시를 받은 후, 다음 기록과 같이 출동을 알리는 장계를 조정에 올리면서 역사적인 첫 출전을 단행하였다.

육지 안으로 향한 적들이 곧 한성을 침범한다 하므로 신과 여러 장수들은 분발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칼날을 무릅쓰고 사생을 결단하듯 적이 돌아갈 길을 차단하고 적선을 쳐부순다면 그들은 후방이 염려스러워 곧바로 북진을 멈추고 후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5월 초4일 첫닭이 울 때 출진하여 바로 경상도로 향합니다.

출동하는 4일 새벽, 맑은 하늘에 별빛이 반짝이는 가운데 첫닭이 울자 전라좌수영 전선은 충무공의 지휘 하에 노를 힘차게 저어 나갔다. 전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동원 어선) 46척으로 도합 85척의 함대를 편성하여 일본군선의 소재지를 탐색하면서 조심스럽게 남해안 동쪽으로 이동해 나갔다. 전선 척수는 85척이었지만, 실제 전투력을 갖춘 전선은 판옥선 24척 뿐이었다. 이때 충무공이 어선까지 동원한 것은 이전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적선이 90여 척이었다는 정보에 따른 것이었다. 첫 전투인 만큼 아군들의 사기를 고려하여 대등한 세력을 형성한 것이다.

이틀 후 한산도에서 1척의 전선을 타고 온 경상우수사 원균이 합류하였고, 곧 이어 원균 휘하 경상우수군 장수들이 전선 3척과 협선 2척을 이끌고 합세함으로써 총 91척의 경상 전라 연합함대가 형성되었다. 연합함대라지만 전라좌수영 전선이 86%(판옥선 28척 중 24척)를 차지하였다.

충무공은 양 도의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작전계획을 세우고 거제도 송미포에서 밤을 지샌 후, 7일 아침 일본전선이 머물고 있다는 가덕 방면으로 항진하였다. 그러던 중 정오 무렵에 거제도 옥포 앞바다에서 척후선으로부터 일본전선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일본수군과의 최초 전투는 조선수군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이기에 충무공은 우선 동요하는 부하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전투준비태세를 갖추었다.

명령없이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 신중하기를 산과 같이 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

조선수군은 옥포만으로 들어가기 전에 항해진형으로부터 전투진형으로 전환하고는 좌우로 늘어서서 포구를 완전 봉쇄한 다음 일본함대를 향해 일제히 진격하였다. 일본전선은 50여 척(《임진장초》에는 30척)이 옥포만에 정박 중이었는데, 바로 토오도오 다카토라(藤堂高虎)가 거느린 전선들이었다. 그 중 큰 전선은 휘황찬란한 그림과 무늬로 치장된 장막을 두르고 뱃전에는 홍백의 작은 기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군은 조선수군이 이처럼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오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치 못한 듯이 육지에 올라 민가에 방화와 약탈을 일삼기에 여념이 없었다. 조선수군이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옥포만은 안개가 자욱하여 일본 수군은 진격해 오는 조선 함대를 뒤늦게 발견하고서야 허둥지둥 배에 올랐다. 그중 6척은 조선수군을 향하여 선봉으로 달려 나왔다. 이 때의 전투상황에 대하여 충무공은 조정에 올린 장계를 통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소속 여러 장수들은 한마음으로 분발하여 모두 사력을 다하였고, 배 안의 무인이 아닌 관리들도 뜻을 같이하여 죽기를 기약하고 싸웠습니다. 적을 동서로 포위하며 공격하니 포와 화살의 소리는 풍뢰(風雷)와도 같았고, 적도 발포하며 배 안의 물건들을 물에 던지느라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우리의 화살에 맞아 고꾸라지는 자와 물에 빠지는 자는 부지기수였고, 적은 일시에 궤멸하였습니다.

위의 기록과 같이 충무공의 지휘하에 조선수군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움에 임했다. 총통을 발사하여 적선을 깨트리고 불태우는가 하면, 총포와 활로 적병들을 사살하였다. 그 결과 적의 선봉선을 포함하여 순식간에 일본전선 26척이 격침되었고, 옥포만은 불바다가 되었다. 26척 중 21척은 전라좌수군이, 5척은 경상우수군이 각각 격침시켰다. 이로써 남해안을 침공한 일본수군과의 최초 전투는 조선 수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해전종료 후 영등포(거제군 장목면 구영리) 앞 바다로 물러난 충무공은 척후선을 배치하고는 군사들을 휴식시켰다. 이 때(하오 4시경) 척후선으로부터 적의 대선 5척이 지나간다는 보고를 받고는 즉시 함대를 지휘하여 이를 추격하게 했다. 조선수군이 추격하자 일본함대는 힘을 다해 싸우면서 도망하다가 웅천 합포(오늘날 진해시 행암동 학개마을)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배를 버리고 도망해버렸다. 조선함대는 손쉽게 빈 배들을 모두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리고는 밤중에 건너편 창원 남포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이튿날(5월8일) 아침에 피난민들로부터 ‘진해땅 고리량에 일본군선이 머물고 있다’는 첩보를 받고는 즉시 출전하였다. 조선함대가 주변을 수색하면서 저도(돼지섬)를 지나 고성 땅 적진포에 이르렀을 때 척후선으로부터 ‘일본선 대 중 소선 13척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선봉함대가 적진포에 도착했을 때 일본전선들은 아무런 경계 없이 모두 포구에 한 줄로 늘어서 있었고, 군사들은 민가를 약탈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조선함대의 위세를 바라보고는 모두 산 위로 도망쳐 버렸다. 그리하여 조선 수군들은 일본의 빈 전선들을 모두 격침시켰다. 이로써 세 번째 전투인 적진포 해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 함대는 이 해전을 마친 후 조식을 하고 휴식하던 중에 전라도 도사(都事) 최철견으로부터 선조가 관서지방으로 피난한 소식을 들었고, 이후 뱃길을 돌려 5월 9일 정오 무렵에 전라좌수영으로 귀항하였다.

이상과 같이 제1차 출전의 세 차례 해전에서 조선 함대가 일본 함대를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총통 등의 화기와 전선의 성능이 우수했던 것 때문이지만, 근본적으로 조선 수군에 맞선 일본 수군이 30 척 미만의 함대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요컨대 제1차 출전은 조선 수군이 전력 상 우세하거나 비슷한 상태에서 일본의 소규모 함대를 각개 격파했던 것이다.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충무공의 지휘와 전술도 해전 승리의 중요한 요소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먼저 첫 번째 출전임을 고려하여 조선함대의 위용을 과시하고 수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수군의 전력을 외관상으로 대규모로 편성한 충무공의 탁월한 식견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척후선이나 피난민 등 적 정보를 획득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며, 아울러 전과에 급급하여 무모한 전투를 수행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전투상황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제1차 출전 상황도〉

▲ 〈제1차 출전 상황도〉


제2차 출전(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해전)

제1차 출전에서 큰 전과를 거둔 충무공 함대는 장병의 휴식과 다음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5월 9일에 본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배들을 더 한층 정비하여 바다 어귀에서 사변에 대비하라.”[益勵舟楫海口待變]고 장수들에게 지시하였다. 따라서 제2차 출전이 시작된 5월 29일까지 전술연마와 훈련 및 무기 마련 등 전투준비에 열중하였다.

충무공이 여러 가지 전비를 서두르는 동안,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일본군의 동향에 대한 공문이 자주 들어왔다. 그 중에서 부산 방면의 일본군들이 차차 거제도 서쪽을 침범하여 연해 등지를 분탕질한다는 정보가 접수되었다. 이에 충무공은 출전할 것을 결심하고 먼저 관할 전라좌수군을 집결토록 하고는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공문을 보내어 6월 3일까지 여수 앞 바다에 모두 집결하여 경상도로 출동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던 중 5월 27일에 ‘일본군선 10여 척이 사천 곤양 등지로 육박해 왔기 때문에 함대를 노량으로 이동했다’는 경상우수사 원균의 급보가 전해졌다. 이 때문에 전라좌수군은 약속된 6월 3일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우수사 이억기에게 뒤따라오라는 공문을 남기고는 5월 29일 새벽에 노량으로 출발하여 그곳에서 경상우수군과 합세하였다. 이때 조선수군은 전라좌수군 전선 23척과 원균의 전선 3척으로 총 23척의 연합함대를 구성하였다. 1차 출전 때 동원했던 어선은 이번에 제외시켰다. 반면에 충무공 휘하 전선 23척 중 잘 알려진 거북선도 포함되어 첫 출전하게 되었다.

제2차 출전의 첫 번째 해전인 사천해전은 이날 근처를 지나던 일본군선 한 척을 추격하던 중 사천 선창에 열박해 있던 일본군선 12척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함대가 정박한 사천 포구는 구릉의 단면에 위치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지대가 높은 위쪽에서 조총을 발사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이었다. 처음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는 포구가 좁고 썰물이었기 때문에 선체가 큰 판옥선이 진입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조선함대는 후퇴하는 체하며 유인작전을 펼쳤는데, 일본군은 위쪽에 있던 병력의 절반인 200여 명이 내려와서 배를 지키면서 조총으로 대항할 뿐이었다.

일본군이 유인작전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맹렬한 공격을 계속하자 충무공은 물러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때 마침 조수가 밀물로 바뀌어 판옥선이 포구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 해전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진 거북선이 돌격하여 각종 총통을 발사하는 동시에 여러 전선이 함께 공격하자 일본군은 언덕 위로 후퇴하였다. 조선함대는 이 기회를 타서 정박해 있던 일본군선 12척을 모두 격침시켰다.

이 해전의 결과 일본 측의 사상자도 많았지만, 조선 수군도 부상자가 없지 않았다. 특히 충무공은 왼쪽 어깨를 관통하는 총상을 입었고, 군관 나대용과 다수의 사부와 격군이 부상당했다. 사천해전이 끝났을 때에는 이미 날이 저물었기 때문에 조선 함대는 배를 돌려 사천 땅 모자랑포에 정박하였다.

그런데, 사천 해안은 경상우도의 서변으로, 바로 옆의 노량 해구만 지나면 전라좌도 해역과 연결되는 지역이다. 이와 같이 제1차 출전 이후 20여 일 동안에 일본수군은 조선수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경상우도 해역을 점령해 왔던 것이다. 이런 움직임에 대한 견제 차원에서 시작된 제2차 출전은 사천에서 시작하여 함대를 점차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일본 수군을 격파해 가는 작전을 펴게 된 것이다.

충무공은 다음날인 6월 1일에 함대를 이동하여 고성 땅 사량도 뒤쪽 바다에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이튿날 아침 8시경에 ‘일본군선들이 당포 선창에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곧 함대를 이동하여 10시쯤 부근에 도착하면서 당포해전이 시작되었다. 일본군 약 300여 명이 반은 성내에서 분탕질하고 있었고, 나머지 반은 험난한 곳을 의지하여 조총으로 공격해 왔다. 이곳의 일본함대는 대선 9척과 중소선 12척이었고, 그 중 대선 한 척은 높이가 6~7미터 정도 되는 층루가 있었다. 그 층루 밖으로는 붉은 비단 휘장을 둘렀고, 사면에 ‘황(黃)’자를 크게 썼으며 그 속에 일본군 장수가 승선해 있었다.

이에 연합함대는 먼저 거북선으로 층루선 밑을 들이받으면서 용머리의 입으로 현자 철환을 쏘고, 또 천지자총통과 대장군전을 쏘아 그 배를 깨뜨렸다. 이때 제2차 출전에 처음 동참한 중위장 순천부사 권준이 활로 일본 장수를 맞히자 곧 휘하의 군관이 뛰어들어 그 머리를 베었다. 이후 일본 수군은 더 이상 대항하지 못하고 도망했는데, 그 와중에 철환과 화살을 맞는 자들이 많았고 일본전선 21척은 모두 격침되었다.

조선수군이 도망하는 일본수군을 추격하기 위해 상륙하려 할 즈음, 탐망선으로부터 ‘일본의 대선 20여 척이 소선을 많이 거느리고 거제도로부터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패잔병들에 대한 추격을 멈추고 당포를 벗어나 바다에서 격멸할 계획으로 바깥 바다로 나갔으나, 조선함대를 발견한 일본함대는 신속하게 부산 쪽으로 도주하였다. 여러 전선이 추격하였으나 날이 저물어 접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진주 땅 창신도에 정박하였다. 이와 같이 6월 2일에 펼쳐진 당포해전도 조선수군의 승리로 끝났다.

조선함대는 6월 3일 새벽부터 일본군선을 찾기 위해 추도(楸島 : 통영군 산양면) 근처의 섬들을 수색하였지만 발견하지 못하고, 날이 저물자 그대로 고성 땅 고둔포에 정박하여 밤을 보냈다.이튿날인 6월 4일이 되자 조선 함대의 사기를 북돋울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그 동안 해전에 동참하지 못했던 전라우수군 함대가 처음으로 합류한 것이다. 이억기가 이끈 전라우수군은 원래 6월 3일 전라좌수영에서 합류하기로 한 약속을 지켰고, 신속하게 전라좌수군 함대의 뒤를 좇아 이날 당포 앞 바다에서 최초로 연합함대를 결성하였다. 전라우수군의 전선 25척이 추가되어 전체 전선이 51척으로 배가되자, 그 동안 해전에 지쳤던 병력의 사기가 충천해 진 것은 물론 다음 전투에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 날 연합함대는 함께 일본 수군을 공격할 방책을 토의하고, 함대를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착량(鑿梁)으로 이동하였다.

6월 5일은 아침부터 발생한 짙은 안개로 늦게까지 움직이지 못했는데, 주변 지역의 귀화인 김모(金毛) 등이 ‘당포에서 ?i긴 일본 군선들이 고성 땅 당항포에 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이에 급히 함대를 당항포로 이동하고 일본군선을 바깥 바다로 유인할 계책으로 우선 전선 몇 척만을 포구로 돌입케 하였다. 잠시 후 먼저 진입한 전선들이 ‘빨리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내오자 함대가 한꺼번에 포구에 들어가 일본 측의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 등 26척과 당항포해전을 펼치게 되었다.

이제까지 여러 차례 전투에서 일본 수군이 해안에 정박해 있거나, 육상에서 공격해 온 경우가 많아 해전다운 해전을 해보지 못한 충무공은 일본군을 해상으로 유인하는 전술을 사용하였다. 그의 명령에 따라 진형을 풀고 퇴군하여 한쪽을 개방하자 일본함대는 대장선인 층각선을 옹위하며 모든 배들이 바다로 나왔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거북선이 층각선 밑에 접근하여 먼저 이 배를 깨트리고, 주변의 전선들도 집중 공격을 가해 대장선의 일본 장수를 사살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수군이 승기를 잡아 전선으로 달아나는 일본 군선들을 포위, 섬멸하여 수급 43개를 베고 한 척만을 남겨둔 채 나머지 군선 전부를 격침시켰다.

이튿날(6일) 새벽에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은 전날 남겨둔 1척이 바다로 나올 것을 예상해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100여 명이 승선한 일본 군선을 급습하여 50급 이상을 베었다. 특히 이날 획득한 수급은 그들의 대장을 비롯한 장수만 8명에 달하는 큰 전과였는데, 이것은 전날 뭍으로 피신했던 일본군 지휘부가 한꺼번에 잡혔기 때문이다. 당포해전에서 패한 일본 수군은 대장선에 있던 기의 표식으로 볼 때 가등청정(加藤淸正) 소속의 수군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이날은 비가 오는 궂은 날씨 때문에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저녁 무렵에 고성 땅 마을간장(乙干場)으로 옮겨 정박하였다.

조선함대는 6월 7일 새벽에 다시 출항하여 웅천 땅 시루섬〔甑島〕에 이르러 주변을 탐색하고, 함대를 돌려 정오경에는 영등포 앞 바다에 이르렀다. 이때 율포에서 부산 쪽으로 도망하는 일본의 대선 5척과 중선 2척을 발견하고 역풍을 받으면서 추격하여 5리 정도를 서로 마주보고 근해까지 쫓아갔다. 이들 일본군선 중 일부는 바다에서 따라잡아 격침시켰고, 나머지는 육지로 도망하므로 빈 배를 모두 격침시켰다. 이 율포해전의 결과 조선함대는 30여 급의 수급을 베고 7척 모두를 격침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해전에서 일본의 이름난 수군장 내도통지(來島通之)는 자신의 함대가 모두 나포되거나 격침되는 모습을 보고 혈로를 뚫고 육지에 상륙하여 할복 자결했다고 한다.

그런 후 조선함대는 부산 쪽을 향하여 가덕도 부근을 탐색하였고, 몰운대 부근에서는 함대를 두 편으로 나누어 수색하였으나, 일본 군선을 찾지 못하고 함대를 거제 땅 온천량의 송진포로 이동하여 정박하였다.

6월 8일에도 창원 땅 마산포, 안골포, 제포, 웅천 등지로 탐망선을 보내 수색하였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송진포에서 머물렀다. 다음 날인 9일에도 웅천 앞 바다에 진을 치고 일본 군선을 수색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함대를 돌려 당포로 돌아와 밤을 지냈다. 6월 10일에는 미조항 앞 바다에서 연합함대를 해산하고 각각의 본영으로 귀항하였다.

조선수군의 연합함대는 제2차 출전의 11일 동안 네 차례 해전에서 일본군선 72척을 격침시키고, 적 수급

수백 급을 베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과를 행재소에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충무공을 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 하계)로, 이억기와 원균을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로 각각 가자(加資)하였다. 그런데 조선함대는 장기간의 출전으로 인해 군량이 떨어지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재정비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작전을 종료한 것이었다. 이 제2차 출전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 상황도와 같다.

〈제2차 출전 상황도>〉

▲ 〈제2차 출전 상황도>


제3차 출전(한산도 안골포해전)

충무공은 6월 10일 제2차 출전을 마치고 본영으로 귀환한 이래, 다음 해전을 위해 공문을 돌려 서로 약속을 정하고 전선을 정비하는 등 준비를 갖추면서 경상도 해역의 일본수군 동태를 탐문하였다.

한편, 초기해전에서의 연패 소식을 접한 일본군 수뇌부는 긴급대책으로 육전에 참가 중이던 수군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에게 남하하여 조선 수군과 대결할 준비를 하도록 조치하였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6월 23일에 해상 보급로 확보와 조선 수군 제거를 위해 위의 세 장수에게 일전을 펼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이때 먼저 전투태세를 갖춘 와키자카는 7월 6일에 구키와 가토가 군선 정비 등 출전 준비를 하는 동안 단독으로 김해를 떠나 출전을 감행하였다. 이때 그가 거느린 세력은 총 73척(대선 36, 중선 24, 소선 13)으로 지금까지 해전에 참가한 일본 함대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충무공은 ‘가덕 거제 등지에 일본군선 10여 척 내지 30여 척이 출몰한다’는 첩보와 함께 전라도 금산 지경에도 일본군이 다가와 수륙으로 침범할 조짐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에 충무공의 전라좌수군은 일본수군을 공격하기 위해 이억기의 전라우수군과 7월 4일 좌수영에서 합류하였다. 전라좌우도 연합함대는 5일에는 작전계획을 논의하고, 6일에 역사적인 제3차 출전을 시작하였다. 이날 전라도 함대가 출항하여 남해의 노량에 도착하자 원균이 그간 준비한 전선 7척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수군함대가 합한 연합함대가 결성되었다. 연합함대의 전선은 총 58척이었는데, 이중 거북선 3척도 포함되었다.

양국 수군세력을 비교하면 전투능력을 갖춘 전선 수는 비슷하였지만, 조선수군이 대선인 전선이 많았고, 전체 척수 면에서도 약간 우세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전투력이 없는 협선 50여 척도 참가하였다. 연합함대는 이날 진주 창신도에 이르러 정박하고 밤을 지냈다.

조선 함대는 출항 둘째 날인 7월 7일에 동풍이 크게 불어 항해하지 못하다가, 저물 무렵 고성 땅 당포에 이르러 머물렀다. 이때 이 섬의 목동 김천손이 와서 ‘일본군선 70여 척이 오늘 오후 2시쯤 영등포 앞 바다를 지나 고성과 거제도의 경계인 견내량에 머물고 있다’는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이 정보에 따라 조선함대는 7월 8일 아침 일찍 일본함대가 있다는 곳으로 출발하였다. 견내량 근처 바다에 이르렀을 때, 일본의 척후선으로 보이는 대선 1척과 중선 1척이 조선함대를 발견하고 저들의 본대가 있는 포구 쪽으로 들어갔다. 조선함대는 이들을 추격하여 일본함대가 있는 곳까지 도달하였는데, 첩보의 내용대로 대소 73척이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당시 일본함대가 머무르고 있던 견내량은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아 대형 선박이 항해하기 어려운 긴 해협이었다. 오늘날 수로환경을 보면 최소 폭이 약 180미터, 최소 수심 2.8미터, 수로 길이는 약 4킬로미터인 곳이다. 그리고 당일 이 해역의 조류는 0.5노트 이하로 해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였다.

충무공은 이곳이 판옥선과 같은 대선으로 해전하기에 적합하지 않을 뿐 더러, 육지가 가까워 일본 수군이 상륙하기 쉬운 점을 고려하여 일본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전선 5~6척을 투입하여 일본 함대의 선봉과 전투하다가 거짓으로 패해 물러나는 것처럼 꾸미자, 적들은 돛을 펴고 추격에 나섰다. 일본함대가 추격을 멈추지 않고 한산도 앞의 넓은 바다에 도달하자, 충무공은 휘하 장수들에게 일시에 선회하여 학익진을 형성하면서 일본 함대에 돌격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먼저 거북선 3척이 출전하여 지자 현자 등 총통을 발사하면서 먼저 일본군 선봉선 2~3척을 격파하자, 일본수군은 사기가 꺾여 물러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함대가 일시에 포위 공격을 펼치자, 일본 함대는 도주하지 못하고 참패하였다. 이런 상황을 충무공은 다음과 같이 묘사할 정도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제장과 군사들이 승기를 타고 서로 다투어 돌진하며 철환과 화살을 발사하기를 풍뢰와 같이 하여 적선을 불사르고 적병을 사살하는 것을 일시에 모두 다 해버렸다.

한산도 해전의 결과를 종합하면 조선함대는 일본의 대선 35척, 중선 17척, 소선 7척 등 59척을 격침 또는 나포하였고, 나머지 대선 1척과 중선 7척 등 14척 만이 탈출해 돌아갔다. 이 해전에서 일본함대를 지휘한 와키자카는 구사일생으로 도주하였다.

한산도 해전에서 크게 승리한 이날은 장병이 피로하고 날도 어두워져 조선 함대는 견내량 안 바다에 진을 치고 밤을 보냈다. 다음날인 7월 9일에는 다시 ‘안골포에 일본군선 40여 척이 머물고 있다’는 탐망선의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즉시 삼도 수사가 모여 일본 함대를 공격할 것을 계획했으나, 이날은 역풍이 크게 불어 항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제 땅 온천도(현 칠천도)에서 다시 밤을 보냈다.

조선 함대가 7월 10일 새벽에 출발하여 안골포에 도착하니 선창에 일본 함대의 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 등 모두 42척이 정박 중이었다. 이곳에 있던 일본 수군 장수는 구키(九鬼)와 가토(加藤) 등으로서 도요토미 직속의 정예 수군이었다.안골포는 포구의 지세가 좁고 수심이 얕아서 전선같이 큰 배가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조선함대는 다시 한번 일본함대를 유인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견내량에서 주력함대가 참패한 소식을 들은 일본함대는 높은 곳을 의지한 채 나오지 않고 해전을 회피하였다. 이에 충무공은 전선 몇 척으로 하여금 교대로 포구에 출입하면서 각종 총통을 발사케 하는 동시에 장편전과 화전으로 집중 공격을 가하도록 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조선 함대는 정박해 있던 일본 군선을 격침시키면서 승선해 있던 장수를 비롯한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다. 이처럼 포구에서 전투가 종일 진행되자 일본 군선은 20척 정도 파괴되었고, 잔존 병력은 육지로 올라갔다. 충무공은 주변 산골에 숨은 우리 백성이 피해를 입을까 우려하여 공격을 중지하고 밤늦게 물러 나와 안골포 근처에서 밤을 보냈다.

조선 함대는 다음날인 11일 새벽에 다시 안골포를 포위하였으나, 밤새 일본 함대가 도주하여 전날 전투를 벌인 참혹한 흔적만을 확인하였다. 조선수군은 일본수군에게 함대가 오래 주둔할 것처럼 제반조치를 취한 후 그날 야간에 회항하기 시작하여 12일 오전에 한산도에 도착하였다. 이때 한산도해전에서 패하고 상륙한 일부 일본 패잔병들이 섬 안에 아직 있었지만 경상우수사에게 이들의 처리를 맡기고, 8일간의 제3차 출전을 종료하면서 7월 13일에 본영으로 돌아왔다.(해전상황도 참조)

〈제3차 출전 상황도〉

▲ 〈제3차 출전 상황도>

이상에서 살펴본 제3차 출전의 결과와 의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함대는 이번 출전을 통해 일본 수군을 대표하는 함대세력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두 차례 해전에서 조선 함대가 거둔 전과는 격침시킨 군선이 79척이고, 적 사살이 9,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반면에 조선의 전선은 1척도 손실없이 사상자만 전라좌수군의 경우 전사 19명, 부상자 114명이었다. 비슷한 비율로 전라우수군과 경상우수군의 사상자를 추정하여 산정하더라도 전사자는 40명 안팎이 될 것이므로 그 피해는 매우 경미한 편이다. 한마디로 완승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한산도해전과 안골포 해전의 승리를 총칭하여 한산대첩이라고 부른다. 한산대첩은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큰 해전이다. 예컨대 해전의 작전지역이 다른 해전에 비해 가장 넓었고, 충무공의 수군전술이 가장 유감없이 발휘된 해전이었다. 이를테면 해전장소를 조선함대에 유리하게 유인작전을 편 것, 학익진이라는 적절한 진형을 형성하여 공격한 사실, 그리고 거북선을 중심으로 선봉선을 공격하여 탄착점을 형성시킨 후 압도적인 화력으로 일본전선을 궤멸시킨 점들을 들 수가 있다.

또한 한산대첩은 임진왜란 전체 국면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를테면 한산도 해전과 안골포 해전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수군장수들이 모두 대패함으로써 도요토미는 일본수군에게 ‘해전금지’의 명령을 내리고 해안에 성을 쌓고 기다리도록 하는 등 전략변화를 가져왔다. 일본수군은 이 명령에 따라 한산도 해전 참패 이후에는 조선수군과의 해전을 회피하는 전술로 일관하였다

특히 유성룡은 이 해전의 의의에 대해 ‘이순신이 한산대첩을 거둬 일본의 수륙병진전략을 분쇄하였고, 더 나아가 전라도와 충청도가 보전하여 이를 바탕으로 조선이 중흥을 이룰 수 있었다’고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요컨대, 조선 수군은 한산대첩의 결과로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일본군의 수륙병진 전략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더 이상 일본 수군이 해전에 나서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제압하였다.


제4차 출전(부산포 등 해전)

조선 수군은 1592년 5월초부터 진행된 세 차례의 출전을 수행하면서, 한편으로 전선을 더 건조하고 무기를 준비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이 사실은 같은 해 8월 1일 전라좌우도 수군이 좌수영에 모였을 때 전체 전선 척수가 7월초 한산대첩 때의 58척보다 16척이나 늘어난 74척으로 증가한 것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또한 제4차 출전에 앞서 8월 1일부터 전라좌우도 수군이 미리 합류한 것도 이전에 없던 일이었다. 앞 시기의 제2차 출전에서는 세 번째 해전부터 합류했고, 제3차 출전 때에는 출항 2일 전에 합류했었다. 이처럼 1개월 전에 합류한 것은 조선함대의 훈련을 위해서였다.

그러던 중 경상우도 순찰사 김수는 공문을 보내 ‘일본군이 양산과 김해 등지로 내려오는데, 도망치려는 것 같다’는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한산대첩에서의 패배로 바다를 통한 보급지원이 무산된 일본군이 육지를 통한 서진을 위해 호남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진주성을 공격하고자 북상했던 일부병력을 소집한 것이었다. 그러나 외관상으로는 일본군이 바다를 통해 물러나려고 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김수는 이러한 사실을 충무공에게 전달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전라좌우도 연합함대는 출항을 서둘러 8월 24일에 좌수영을 출발, 제4차 출전을 시작하였다.

이때 전라좌우도의 전선은 합하여 166척으로 이중 전선은 74척, 전투능력이 없는 협선은 협선은 92척으로 구성되었다. 첫날은 남해 땅 관음포에 닿았다가, 자정 무렵 다시 항해하여 사천의 모자랑포에 정박하였다. 이어 25일에는 약속한대로 사량 앞 바다에서 원균과 합세하였고, 당포 앞 바다로 이동하여 정박했다. 이때 원균이 지휘한 경상우수군의 전선척수는 사료에 나타나지 않아 구체적인 척수를 알 수 없으나 이전 시기 7척보다는 늘어난 10여 척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경상우도와 전라좌우도의 연합함대를 결성한 조선수군은 출전 이후 5일동안 수색 작전을 펼치면서 부산 쪽으로 전진을 계속했지만 일본함대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출전 6일 만인 8월 29일에 동래 땅 장림포에서 처음으로 일본의 대선 4척과 소선 2척을 만나 이를 모두 격침시켰다. 이중 5척은 경상우수군이, 1척은 전라좌수군의 우후 이몽구가 격침시켰다. 여세를 몰아 강안으로 진입하려고 했지만, 그곳의 형세가 매우 좁아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저물 무렵 가덕도 북쪽에 와서 정박하였다.

조선함대는 9월 1일 새벽에 출발하여 아침 8시경 몰운대를 지났는데, 이때 강한 동풍과 큰 풍랑이 일어 간신히 함대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함대는 동쪽으로 전진을 계속하여 화준구미에 이르러 대선 5척, 다대포에서 대선 8척, 서평포에서 대선 9척, 절영도 앞 바다에서 대선 2척을 각각 만났는데, 이들 모두를 격침시켰다.

이후 다시 절영도 주변을 수색하였으나 일본함대를 발견하지 못한 조선함대는 작은 배를 보내 부산포를 정탐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부산포에 일본군선 470여 척이 정박 중인 것을 발견하고 곧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날 새벽부터 계속된 항해와 몇 차례의 전투를 수행한 뒤였기 때문에, 부산포해전이 시작되었을 때는 이미 저물 무렵이었다. 조선함대는 초량목에서 선봉으로 나온 대선 4척을 맞아 모두 격침시키고, 장사진(長蛇陣)으로 돌진하면서 일본 진영을 공격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모두 산 위에 올라가 6개 처로 나누어서 조선 함대를 향해 철환과 화살을 쏘면서 반격하였다. 그러나 조선함대는 천자 지자총통과 불화살 등으로 공격을 계속하여 다수의 군선을 격파하고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켜 일본 측에 큰 손실을 주었다.

이 날의 부산포 해전은 작은 함대를 이끌고 약 6배에 달하는 대규모 세력에 맞선 해전이었을 뿐 아니라, 일본 수군의 근거지를 공격한 의미 있는 일전이었다. 전투 결과는 조선 함대가 일본군선 100여 척을 격파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는데, 아쉽게도 충무공의 핵심참모인 용장 정운이 전사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충무공은 수군의 힘만으로 일본군을 물리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다시 말해 위로 올라간 적들이 여러 곳에 가득 운집해 있었으므로 수륙으로 함께 진격하여야 섬멸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렇지만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육군의 능력이 미약한 처지에서 당장 수륙합공을 실시하기가 불가능하였다.


〈제4차 출전 상황도>〉

▲ 〈제4차 출전 상황도>

또한 부산 해역은 남해에서도 외해와 바로 연결되는 곳이기 때문에 파도가 심해 전선을 운용하기 힘든 곳이었다. 조선 함대는 이곳에서 전투를 벌여 큰 전과를 거두었지만, 정운 외에도 전라좌수군의 경우 전사 6명과 부상 25명이라는 인명 피해를 입었다. 전라우수군과 경상우수군도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그리고 항해와 전투 과정에서 전선이 파손되어 수리를 요할 뿐 아니라, 군량을 다 소모했기 때문에 조선함대는 9월 2일에 해산하여 각자 본영으로 돌아왔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산포해전은 이전의 해전들과는 달리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포를 공격했다는 점과, 참전규모와 그 전과가 임진년 해전 중에서는 가장 컸다는 점에서 해전사적인 의미가 크다. 또한 이전부터 일본수군이 조선수군을 회피하면서 해전 때마다 도주를 일삼았지만, 부산포해전 이후에는 해안에 축성(築城)한 뒤 육상에서만 조선 수군을 상대하려는 해전회피 전법이 고착화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향후 수륙합공 작전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1592년 한 해 동안, 총 네 차례의 출전과 16회의 해전은 마무리되었다. 조선 수군이 임진년 초기해전에서 거둔 전승은 전체 전국(戰局)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 육전에서의 고전을 해상에서 설욕한 의미도 있었다. 또한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하여 일본의 수륙병진 전략이 분쇄된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해상 보급로마저 위협받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일본수군은 해전을 포기한 채 해안 고지대에 축성하여 주둔하면서 육군의 지원을 받아 조선 수군의 공격에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도요토미가 직접 도해하여 전쟁을 지휘할 기회를 무산시킴으로써, 일본군의 전쟁 지도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고 볼 수 있다. 임진년 네 차례 출전에서의 해전결과를 종합하면 다음 표와 같다.


〈제4차 출전 상황도>〉

▲ 〈임진년 해전결과 종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