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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전유적지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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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포 첨망대
관음포 첨망대
명칭 관음포 첨망대
주소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산125
전화번호 055) 864-2131
홈페이지 -

내용

1965년 4월 13일에 고 박정희 대통령이‘이락사(李落祠)’와‘대성운해(大星隕海)’현판을 직접 써 붙였다.
그리고 1991년 2월 16일에 유허 비각이 있는 곳에서 500m정도 능선을 따라 바다 쪽을 향하면 임진왜란 당시 치열했던 광양바다와 노량해협 그리고 관음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첨망대를 2층 누각으로 건립하였다.
그리고 입구 잔디광장에는 이순신 장군이 유언한

“전방급신물언아사(戰方急愼勿言我死)”

라는 글씨로 높이 8m의 자연석 유언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1998년 12월 16일 이순신 장군 순국 400주년 추모식전에 제막되었는데 글씨는 남해군 설천면 출신의 유삼남 전 해군참모총장의 휘호이다.

이락사의 소유는 사단법인 남해충렬사이며, 남해군에서 사적지로 관리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전몰한 무명의 수군들이 우리나라를 지켜내지 못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했을지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이충무공전몰유허 한글비
이충무공전몰유허 한글비
명칭 이충무공전몰유허 한글비
주소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산125
전화번호 055) 864-2131
홈페이지 -

내용

1990년에 세워진 이 비의 앞면에는‘이충무공 전적비’라 쓰여 있고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있다.

단기 삼천구백이십오 년에 일본군들이 침범하니 이것이 임진난이다. 이때의 전라좌수사 이충무공은 이를 크게 분히 여겨 거북선을 만들어 적을 옥포와 노량에서 깨뜨리고 사량과 당항포에서 무찌르며 영등포에서 크게 전공을 이루고, 견내량에서 적을 꾀어 이를 물리치니 붉은 피가 바다에 넘치다.

이어 안골포를 거쳐 부산을 나아가 적을 패하고 한산도에 진을 치시니 일본군이 크게 두려워하다. 선조대왕께서 공을 칭찬하시고 벼슬을 높이시어 삼도통제사의 대임을 맡기시다. 왜장 행장이 도망하고자 하여 사자(使者)를 보내 공에게 애걸하였으나 공이 엄하게 물리치시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꺽여지다.

사천 일본군과 남해 일본군이 노량에 모여들고 또 광주로부터 적선 오백척이 들어와서 행장과 힘을 합하였다. 공이 이를 관음포에서 맞아 싸워 적을 크게 물리칠 때에 불행히 적의 탄환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54세요, 그날은 단기 3931년 11월 19일이었다. 왜란 7년 동안 전적이 가장 많으신 이 땅에 비를 세우니 공의 장렬하신 공적은 진실로 천추에 빛날 것이다.

관음포 유허비
관음포 유허비
명칭 관음포 유허비
주소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산125
전화번호 -
홈페이지 -

내용

앞면에는 “유명수군도독조선국삼도통제사증의정부영의정시충무이공순신유허비(有明水軍都督朝鮮國三道統制使贈議政府領義政諡忠武李公舜臣遺墟碑)” 라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번역문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남해현에서 곧장 남쪽으로 20리에, 넘치는 바닷물이 빙 둘러 도는 곳이자, 전쟁에 필요한 배들이 출입하고 있는 그 땅을 이름하여 관음포라고 하는데, 이곳은 고(故) 삼도통제사 증 의정부영의정 이충무공이 순국한 곳이다.

공이 수군으로 바다에서 왜구를 크게 격파함으로써 바다에 왜놈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된 지가 지금까지 230여 년이나 되는데, 공 자신은 날아오는 총알에 맞아 돌아가셨으니, 아! 임진년(1592 선조 25년)의 난은 우리 동방에 재앙이 드는 해였다. 이 때에는 충성스럽고 용기와 지혜가 있는 몇 사람이 우리 선조 임금을 도와서 중흥을 이루어 그들의 공이 모두 이종[彛鐘옛날 공신의 이름을 새겨 보관하여 오래 전한 일종의 제기]에 새겨지고, 역사에 기록되어 밝게 빛나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공훈이 천지에 가득하고 명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밝게 빛나 우주를 흔들고 해와 별처럼 드높은 사람으로 말하자면 아낙네나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가 한마디도 의논하지 않고 선뜻 이순신 장군을 으뜸으로 친다.

공은 벽촌의 나약하기만 한 군사로써 용기 넘치는 백만의 일본군을 맞아 굳세게 나라를 지켜내는 인물이 되었다.
이것은 장수양[張誰陽안녹산의 난을 막은 당나라 장수]과 같고, 물결을 가로질러 물 흐름을 끊고서 기발한 계책으로 싸워서 저 흉악한 무리를 패배시켜 모두 불타 없어지게 한 것은 주공 근[오나라 주유의 이름, 적벽대전에서 조조 함대를 불공격으로 대파함]과 같다.
적은 군사로써 많은 군사를 쳐서 앞으로 나아가자, 굳세게 항거하는 일본군이 없고, 위세만으로도 적이 떨며 복종하게 하여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모든 일본군이 소문만 듣고도 도망치게 한 것은 악무목[岳武穆남송의 충신 금나라 군대를 물리침]과 같다.

천하를 다시 편안하게 만들어 위태로움을 돌려 태평하게 안정시켜 그 한 몸에 종묘와 국가의 운명이 달린 것은 곽분양[廓汾陽당의 명장 현종 때 안사의 난을 평정함], 이서평[李西平당의 명장 덕종때 주비의 난을 평정함]과 같다.
정성을 펴고 공정함을 펴서 몸이 다하도록 힘쓰고 애써서 덕과 위엄이 함께 빛나, 농민과 병졸까지도 모두 감복(感服)시키고 마침내는 몸 바쳐 싸울 작정을 한 것은 오직 제갈무후[諸葛武侯제갈량 촉한의 승상]만이 그와 같다. 무후가 죽은 것은 병 때문이었는데, 공이 죽은 것은 전사였다.
그러나 무후가 죽은 뒤엔 한나라의 종실이 위태롭게 되었지만, 공의 경우엔 비록 죽었지만 남은 공렬(功烈)의 은덕(恩德)을 입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직이 거기에 힘입고 있으니, 공은 여한이 없을 것이다.

공의 드높고 큰 공적과 충성은 윤음[倫音임금님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에서 찬양되었고, 염완[琰琬나라의 보물 그릇]에 밝게 빛나고, 태상[太常예조 소속의 시호를 내려주는 관직을 말하고, 맹부는 공신의 훈공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하던 관아]에 기록이 있고, 그 사적이 맹부[盟府서약의 서류를 넣어두는 창고]에 보관되어 있어, 학사대부(學士大夫)가 기리고 서술하는 가운데에 빛나고 빛나니, 진실로 다시 더 군소리를 첨가할 필요가 없다. 다만, 공의 공적은 사실 바다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호남의 수사로서 무공을 처음으로 떨친 데 대해서는 좌수영대첩비가 있고, 벽파의 싸움에서 적의 총칼을 막아 기호지방[畿湖地方경기도 및 황해도 남부와 충청남도 북부 지방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길이 안정시킨 데 대해서는 명량대첩비가 있으며, 삼도통제영에 있으면서 깃대를 세우고 병영을 건조하여 앉아서 평화와 안정을 거둔 데 대해서는 고성충렬사비가 있고, 순천의 충민사, 남해의 충렬사, 고금도의 탄보묘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적이 드러나게 새겨져 있어서 영원히 그 공적을 알리고 있다.

그런데 유독 용맹하게 싸우다 살신성인한 곳에 대해서는 그 사실을 드러내어 밝힌 글이 없다. 우리 성상[聖上순조를 가리킴] 32년 임진년(1832)은 선조께서 회복을 도모한 지 4주갑[周甲1주갑이 60년이므로 4주갑은 240주년째가 되는 해]이 되는 해이다. 성상이 임진년(1592)을 회고하면서 감회를 일으켜 충성하고 수고하여 공이 높은 모든 사당에 제사를 내릴 적에 공에게 그 은전이 제일 먼저 미쳤다.
이때 공의 8세손인 이항권이 실제로 공이 맡았던 벼슬을 하여 삼도 수군을 통제하였는데, 왕명을 받들어 이 땅에서 제물을 바쳐 제사하고, 단을 설치하여 신령이 강림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물러나와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큰 돌을 다듬어 그 터를 표시하고 새기어 드러내려 하니, 이를 본 사람들이 통제사가 자손 노릇을 옳게 잘하였다고 말하였다.

작도정사
작도정사
명칭 작도정사
주소 사천시 서포면 외구리 105-1
전화번호 -
홈페이지 -

내용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최초로 해전에 이용한 곳이며, 퇴계 이황 선생이 곤양면에 들렀다가 배를타고 비토섬 근처를 유람하며 시를 지었다는 작도정사, 남명 조식선생이 쾌자정에 올라 주변 경치에 탄성을 자아내었다는 쾌자정, 서부 경남 일원의 세곡미를 서울로 실어 나르는 포구 역할을 했던 가산조창과 가산오광대 등의 역사유적이 주변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 정사는 1928년 봄에 이곳 유림들에 의해 건립 되었다가 오랜 비바람에 견디지 못해 도괴된 것을 1954년 지방유지들에 의해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38년경에 간척사업으로 인하여 지금은 농경지로 변했으나 이 건물이 세워질 때만 해도 조그마한 "까치섬"이었다. 비록 정면 4칸, 측면 2칸의 목조와가에 불과 하지만 조선 중종 때 당시 곤양군수 어득강이 퇴계 이황을 초청하여 풍월(風月)하던 곳으로 뒤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곳 유림들이 건립한 것이다.

현재 이 정사에서는 매년 음력 4월 초 정일(丁日)에 "선사퇴도이선생(先師退陶李先生)이라 쓰고 다례(茶禮)를 올리고 있으며, 정임(亭任)은 금계원(金繼源)이다. 정사아래 도로변에는 퇴계 이황이 이곳에 머물고 갔다는 표적을 남기기 위해 유계에서 "퇴계이선생장구지소(退溪李先生杖字之所)"라 새긴 석비 하나가 세워져 있다. 장구지소란, 지팡이와 삼신(蔘鞋)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곳은 섬이었으나 1938년 간척공사로 인하여 육지로 되었다.

조,명군총
조,명군총
명칭 조,명군총
주소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402
전화번호 055) 831-2725(문화관광과)
홈페이지 -

내용

사천읍에서 서남쪽으로 약 7km 지점인 용현면 선진리 402번지에 있다. 이 군총은 조선조 선조 30년 1월에 일어났고 이른바 정유재란 때 선진리성(당시는 신채라고 함)에 포진하고 있던 왜적을 몰아내기 위해 조명연합군이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가 산화한 희생자의 넋이 잠들고 있는 곳이다.

무덤의 형태는 사방 20간(35m)의 방형분묘로서 흔히 "당병무덤"이라 일컬었으며, 속칭 "댕강무데기"라고도 한다. 해방 전까지는 무덤 위에 <당병공양탑>이라 쓰인 높이 1m가량의 표석이 서 있었으나 해방 후에는 없어졌다.

그러나 이 무덤만은 약 400여년 동안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채 잘 보존되어 왔으며, 지금은 조,명연합군 전몰 위영비가 무덤 앞에 세워져 있고 또 1985년 11월 14일 지방문화재 기념물로 조명군총이라 명명하여 보호되고 있다.

조명군총의 유래를 살펴 볼 것 같으면 1592년 임진년 4월 우리 나라를 침략한 일본은 강화교섭을 3년이나 끌다가 결렬되자, 1597년 1월 일본이 우리 나라를 재침하여 북진하려다 육지에서는 9월 6일 괴산 근방 소사전투에서, 해상에서는 9월 16일 노량해전에서 대패하여 서진과 북진 계획이 저지되자 전국에 일대전환이 왔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서둘러 경상도 남해안 지방으로 퇴각하여 동쪽으로 울산에서부터 서쪽으로 순천에 이르는 800여리 연해에 성을 쌓거나 또는 수축하고 분주하였다. 이때 사천지방에는 그해 12월에 왜장 모리길성이란 자가 선진에 상륙하여 성을 수축한 것을 그 이듬해 왜장 도진의홍 부자가 진을 쳤는데 명나라 동정군의 중로제독 동일원과 경상 우병사 정기룡이 약 3만여 병력으로 9월 19일부터 진주에서 남강을 건너 망진채, 영춘재, 곤양성을 차례로 빼앗고 사천구성의 적도 크게 무찌른후 10월 초 하루에는 선전이 신채를 다그쳐 왜적을 바다로 몰아내려다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이 때에 아군 진중의 폭약궤에서 발생한 불의의 화란으로 적계의 역습을 받게 되어 아군은 수천명의 희생자를 내었는데 이때 분사한 전사자의 수급을 적의 손으로 장사된 곳이 즉, 이 무덤인 것이다. 적은 이 전투에서 38717명의 목을 배었다고 공칭하였으며 도진의홍은 그의 부하인 후시래 손좌 위문에게 명하여 성 밖에다 사방 20간 되는 땅을 파서 수급을 묻고 큰 무덤을 만들어서 진승 졸사파가 장례를 집행한 후 "경관"이라 명명하였다고 했다.

또한 참수한 수급의 코와 귀를 베어 큰 나무통 10개에 넣고 소금에 절인 후 전공공물로 본국에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측의 자료 선조실록에 의하면 당시 전사한 조.명군의 수는 7,8천명에 이른다고 하여 3만명 이상의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물론 승자 쪽에서는 전과를 크게 과장하려 하고, 반대로 패자 쪽에서는 그 피해를 가능한 줄이려고 하는 것이 예사라는 점을 감안 한다면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3만명 대 7천명이라는 큰 차이는 과장이라도 이만 저만의 과장이 아닐 수 없다.

더우기 당시 동일원 휘하의 조.명 연합군의 총병력이 약 3만명 보다도 많다는 점에서 믿기 어려운 숫자인 것이다, 당시 왜군이 전공공물로 코와 귀를 잘라 보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들은 전투한 뒤 또는 분탕질할 때 가능하면 죽은 사람의 코와 귀를 잘라 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과장된 것으로 보이는 일본측 기록의 3만8천명 가운데는 10월 1일 전투에서의 명군전사자 외에 그 이전의 여러 전투에서 전사한 명군과 조선군 및 이러한 전쟁통에 억울하게 죽은 일반 양민, 그리고 오래전부터 자행해 온 왜군이 분탕질로 무참히 학살 당한 인근 지방의 양민들의 숫자도 포함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천 선진리성
사천 선진리성
명칭 사천 선진리성
주소 -
전화번호 (055) 831-2114
홈페이지 -

내용

사천읍에서 서남쪽 약 7km지점,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사천만의 동안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구릉의 지형을 이용하여 구축한 평산성식의 토축으로 된 창성이다. 이 倉城은 본래 서남북의 삼면이 바다에 임하고 東쪽 一面만 육지로 通하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수륙요새였다.

그러나 지금은 간척 사업으로 인하여 남북의 이면은 모두 농경지로 변하고 서쪽 일면만 바다로 연해 있으며 성지는 모두 밭으로 개간되어 고지 일부만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성은 왜성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는 정유재란때 왜군이 사천 지역을 장악한 후 이곳을 중요 거점으로 삼기 위해 당시 왜장이 었던 모리길성으로 하여금 성을 구축했다는 일본측 기록 즉 도진가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 성에 관한 우리의 관계 문헌이 많이 있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고적(古跡)을 고찰(考察)해 보면 결코 왜성(倭城)이 아니라는 확증을 얻을 수 있다.
먼저 이 성(城)이 위치한 지명(地名)부터 살펴 보면 고려초(高麗初) 남도수군(南道水郡(軍)에 설치한 12조창(漕倉) 중의 하나인 통양창(通陽倉)이 자리한 곳으로 조창이 설치될 무렵 이곳의 지명(地名)을 통양포(通陽浦)또는 통조포(通潮浦)라 하였다.

이어 조선 초기에 통양포(通陽浦)가 다시 통조포(通潮浦)로 변했는데 조창명(漕倉名)도 이에 따라 통양창(通洋倉)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사천현조(泗川縣條)에 의하면 이때가 태종(太宗) 3年(1403)의 일로써, 이후 통양창(通洋倉)은 왜구(倭寇)의 빈번한 침입(侵入)으로 조운(漕運)이 폐지되고 조세운송(租稅運送)은 육로(陸路)로 전환(轉換)되었다.
임진란(壬辰亂)이후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이곳의 지명(地名)을 법질도(法叱島), 선창(船滄), 신채(新寨), 동양(東陽), 그리고 동양창(東洋倉)따위로 기록(記錄)하고 있다.
이 가운데 동양(東陽)과 동양(東洋)은 전사(戰寫)과정에서 음운상(音韻上) 통양(通陽)과 통양(通陽)의 오사(誤寫)로 여겨진다. 그리고 신채(新寨)라 함은 泗川古城과 구별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나무울로 된 왜채(倭寨)를 뜻한다.

조선후기에는 수군(水軍)의 진보(鎭堡)인 전선소(戰船所)가 설치되어 선진(船鎭) 또는 선소(船所)라 했고 舊韓末때는 계(溪)라 불렀으나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병합(倂合)에 따라 연포동(連浦洞), 통양동(通洋洞)일부를 편입시켜 오늘의 선진리(船津里)가 되었고 성명(城名)도 선진리성(船津里城)이 된 것이다.
다음은 조창지(漕倉地)로서의 선진(船津)에는 이를 지키기 위해 창성(倉城)이를 뒷받침해 주는 문헌(文獻) 가운데 동국여지지(東國與地誌)와 사천현여지승람(泗川縣與地勝藍) 고적조(古跡條)에 의하면,
고통양창 재현남십칠리통양포상 고려초설창수 부근주현조세조지경즉12창지일금유토성기지주3816척(<동국여지지>사천현고적조) [古通陽倉 在縣南十七里通陽浦上高麗初設倉收附近州縣祖稅漕至京卽十二倉之一今有土城基址周三千八十六尺<東國與地志>泗川縣古跡條]

즉 "고려초(高麗初)에 설치한 고통양창(古通陽倉)은 현(縣)의 남쪽 17里 통양포상(通洋浦上)에 있고 부근(附近) 고을의 조세(租稅)를 거두어 서울(당시는 開城)로 조운(漕運)하였으니 곧 12조창(漕倉)의 하나로 지금도 둘레 3,086尺의 토성(土城)터가 남아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 두 기록(記錄)에서 세 가지의 공통점을 들 수 있다. 첫째는 거리 17里이고 둘째는 조세(租稅)를 거둬들인 창(倉)이 있는 점, 셋째는 토성지(土城址)3,086尺의 규모이다.

여기 거리 17里(1里는 약 400m)는 지금의 6.8km가 되므로 당시 현청(縣廳)의 소재지 사천읍에서 조창지(漕倉地) 선진(船津)까지는 7km가 된다. 그리고 셋째의 토성지 는 창성으로서 지금도 그 형적의 일부가 역력히 남아 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여지껏 이 토성지는 옛 당병성 터, 또는 왜성으로 잘못 알려져 온 것 이다.

조창의 기능은 원래 국가 경영의 재정적 세원을 거두어 보관했다가 해로를 통해 중앙에 조운한 기지였으므로 그 중요성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중앙에서 판관이 파견되어 이를 관장하였고, 한편으로는 해구의 침입과 약탈을 막기 위해 창성을 쌓고 수군이 방어하였으니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와 같이 고려 초부터 이곳에 택지된 까닭은 지정학상 이 지역은 일찍이 수도경작이 시작되어 물산이 풍부하였고 또 바닷길이 열려 삼한 때부터 무역 관계를 개설하여 布, 鐵등의 물자를 중국과 일본에 교역하였다는 기록도 볼 수 있다.

임진란시 이 성을 중심으로 바다와 육지에서 두 차례의 큰 싸움이 있었다. 그 하나는 해전으로서 선조 25年(1592) 5月 29日 함선 23척을 이끌고 여수본영을 떠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선진 앞 바다에 이르러 거북선을 앞세워 왜적과 치열한 싸움 끝에 적선 13척을 모조리 쳐부수는 전과를 올렸으니 이 싸움이 李忠武公의 제2차 사천 해전이며 이때 해전 사상 처음으로 거북선이 등장하였다.

다음은 육전으로서 정유재란 때인 무술년 10월 초하루 明나라 중로제독 동일원은 마병, 보병으로 구성된 전병력을 동원하여 이 성을 공격했다.
적은 8,000여 병력으로 아군의 1/4정도였다. 이때 보병유격장 팽신고는 적의 성채를 공격하던 중 진중에서 화포의 오발로 탄약궤에 인화되어 화염이 치솟고 아군이 혼란에 빠지자 효기를 포착한 성채의 적이 역습으로 나와 먼저 팽신고의 포진지를 유린하였다. 이때 유격장 모국기와 엽방영이 성채 북쪽의 고지에서 잔병을 수습하고 적 출격대의 배후로 돌아 성으로 돌진하여 성에서 나온 적을 괴멸직전까지 몰아 넣었으나 아군은 먼저 기병제장의 전열이 흩어져 북으로 패주했다. 이 싸움에서 아군은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으며 당시 치욕의 전흔 지금의 선진리성 위치한 조명군총이다.

『(전략) 채삼면임강 일면통육 인해위호 해 박채하천계 축금해 고성위좌우익 일원분마보래공 보병유격팽신고대부격채 쇄기수처중군진핍적호 훼기책홀영중포열 연염창천 적승세충격 고성원적역지 기병제장선분 일원역환진주』

≪사천현여지승람≫ (1699년간)에 의하면 숙종조 때 선진리에는 수군의 전선소 즉, 진보가 설치되어 전선, 병선 각 1척과 사후선(=정탐선) 2척이 상시 배치되어 해안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성내에는 비후과 수전군기고 그리고 관해정 등의 건물이 있었는데 병력으로는 수군 40주사사 및 도합 156명이었다.

목태림이 쓴 동성부에 의하면 능노군 145, 포수 34, 화포수10, 사궁 30명 등이 상주하고 영조 36년(1760)년 설치한 晉州 가산창의 방어 임무 뿐 아니라 수시로 부조할 때 호위를 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대원군은 연해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해안 방어의 요충과 변방의 중요한 곳에 많은 진을 설치했다. 이때 외적방어에 효과가 많은 포군을 많이 양성했는데 포군은 조총을 주로 사용한 총 수와 화포를 사용한 포군이 있었다. 그러나 구한말 때인 1895年 통제영을 비롯하여 각 도의 수영이하 모든 군영을 해체하고 배를 비롯한 모든 장비는 군부로 넘어 갔는데 선진에 진보도 이때 해체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앞서 1894 동학난이 일어났을 때 동학 농민군이 선진리 성내에 있던 군기고의 무기 일부를 탈취하여 고승당산에서 일본과 싸웠다는 전설이 있다. 선진리성은 일제 때 일제당국에 의해 임진난시 일본군의 전승지라 하여 관심을 끌은 바 있고, 1936년 5월에는 이 성를 고적 제 81호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63년 1월 21일자로 사적 제 50호로 지정되었으나 다시 1998년 9월 8일자로 지방문화재 자료 274호로 지정되었다. 무술전투 당시 왜장이었던 도진의홍의 후예들이 1918年경 이 성터의 일부를 매수 또는 기부받아 공원으로 조성하고 공원 정상에다 사천신채전첩지비라 새긴 비석을 세웠으며, 때때로 일군 장성들이 그들 조선의 전적지라 하여 돌아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비석은 해방되던 그 해 주민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다만 그때 심은 벚나무 천여주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사천에서는 1978년 사업비 4,700여만원을 들여 공원경내에 이충무공 사천해전승첩비를 세우고 충무공 이순신이 이 곳 선진 앞 바다에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왜선을 격파한 국난 극복사의 현장임을 알려주고 있다. 또 일본 사람들이 세웠던 비석자리에는 6.25 전쟁때 산화한 공군장병 전몰자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충령비가 우뚝 서 있다.
현재 경내에는 편의시설 2동과 돌계단 70m 가 설치되어 있고 공원입구에는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의 편의 뿐 아니라 공원으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하고 있으며 야외 공연장도 마련하여 공원을 찾는 단체 및 학생들의 공연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백천사
백천사
명칭 백천사
주소 사천시 백천동 112
전화번호 055) 831-2725(문화관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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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300년 전 신라 문무대왕 시절 의선대사(의상대사의 속세 형제)가 백천사를 처음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몸속법당 부처님을 모시게 된 백천사가 있는 와룡산에는 옛날의 절터가 많기로 유명하다.

구전(口傳)되는 전설로 와룡산에는 팔만구암자(八萬九菴子)가 있었다고 전하는 것을 보면 꽤 많은 사찰(寺刹)이 이 산 속에 들어 앉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양지(晋陽誌)등에 나오는 백천사(白泉寺)의 기록에는『백천사는 와룡산의 서편에 있었다. 도솔암에서 흘러 내리는 동쪽 계곡은 양구택, 조황담, 백련폭이 그 중 아름다운 곳이요. 선정암에서 흘러 내리는 절의 서쪽 계곡은 세심정, 무금대등의 좋은 경치가 있고 동서계곡의 상하에 물레방아 16개소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뒤에는 12개만 남았다. 묵계암도 백천사 북쪽 10리에 있었다.』하는 것으로 보아 대충 백천사의 위치를 가늠해 볼수가 있을뿐 아니라 백천계곡의 경관마저 짐작이 된다.

이 절터 부근에는 축을 쌓은 돌담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석기(石器)등 기왓장이 부서진 채 널려 있는 것을 새롭게 재건축하여 구국도량의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구국 도량으로써의 백운동은 임진왜란때 사명대사께서 승병(僧兵)들과 함께 왜군과 싸워서 물리쳤다는 기록도 전해오는 곳이다. 또한 이순신 장군이 수륙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진두 지휘를 하셨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모충공원
모충공원
명칭 모충공원
주소 사천시 송포동 산 165-3
전화번호 055) 831-3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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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숲이 울창한 공원으로 아래쪽으로 잔잔한 바닷가를, 건너편으로는 멀리 선진이 내려다 보이는 경치 좋은 공원이다. 새로 포장된 일주도로를 따라가면 시원한 바다와 산의 전경을 동시에 느낄 수 있어 좋은 드라이브 코스이다.

삼천포에 이르러 남양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2 km 가량 가면 언덕 오른쪽에 비교적 넓은 잔디밭이 송림에 둘러싸여 있는 곳이다. 남양에서 들어가는 길 좌우(송포동)는 포도밭이고 이 곳을 멀리서 보면 마치 거북이 엎드린 모양이라 거북등이라고 부르고 또는 모충공원이라 부른다.

이 곳에 충무공의 공적비가 있고 멀리 남해대교가 희미하게 보인다. 여기서 새로 포장된 일주도로를 따라가면 (약 8km) 시원한 바다의 전경과 산의 정취를 함께 느낄 수 있어 드라이브 코스로도 훌륭하고 길은 대방 굴항으로 이어진다.

포도밭옆의 광포마을 앞에는 잔잔한 파도가 일고 있어 윈드서핑의 최적지로써 동호인들이 많이 찾고 있다.

대방진굴항(大芳鎭掘項)
대방진굴항(大芳鎭掘項)
명칭 대방진굴항(大芳鎭掘項)
주소 사천시 대방동 250
전화번호 055) 831-2725 (문화관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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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고려시대 말엽에 우리나라 연안을 빈번히 침범하던 왜구(倭寇)의 노략질을 방어(防禦)하기 위하여 지금의 늑도(勒島)에 구라량(仇羅梁 : 뒤에 仇良梁)을 설치하고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지켰다. 그러나 조선조에 이르러 세종 때 구라량이 고성의 사도(蛇島)로 옮겨감에 따라 구라량은 폐영(廢營)이 되고 말았다.

그후 성종 19년(1488)에 새로운 삼천진(三千鎭)이 설치되어 삼천포의 근해를 방비하다가 임진왜란을 겪은 후 지금의 용현면 선진으로 옮겼다가 다시 통영의 미륵산 아래로 옮겨 갔다.

그리하여 삼천포 근해가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순조(1801∼1834년) 때에 이르러 진주목 관하의 남해 창선도의 적량첨사(赤梁僉使)와의 군사연락과 왜구 방비를 위해 설치한 것이 대방선진(大芳船鎭)이다.
선진에는 병선의 정박지로 사용하기 위하여 뚝을 쌓아 활처럼 굽은 만(彎)을 만들고 굴항(掘項)을 설치하였다. 이를 한편으로는 굴강(掘堈)이라고도 하는데, 둑을 쌓을 때 사용한 흙은 각산개의 백토를 날라와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의 선진에는 전함 2척과 300명의 수군병력이 상주하고 있었다.

굴항의 축조공사에는 진주관아 73개의 면민이 동便퓸?1820년경에 완공하였으며, 굴항 북편에는 수군장이 거처하는 동헌과 많은 관사들이 있어 수군촌(水軍村)을 이루었다고 하며, 또 잡곡을 포함한 환향미(還鄕米) 2만여 섬을 저장한 선진창(船鎭倉)도 있었다.

현재는 새로이 복원된 모습이고 주민들이 선착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1832년의 <진주목읍지(晋州牧邑誌)>창고조에 ‘재주(在州) 남 80리 말문면(末文面)의 선진창(船鎭倉)이라 한 것과 이 고장의 문인 노봉(魯峰) 김재식(金載軾)은 굴항을 두고 시를 지었는데 시제(詩題)가 ‘대방선진(大芳船鎭)’이었다고 한다. 굴항 서편에는 군인숲(軍士林)이 있는데 병사들의 휴식처이기도 했고 병사가 죽으면 가매장 하던 곳이라 한다.

노산공원
노산공원
명칭 노산공원
주소 사천시 서금동 101 일원
전화번호 055) 831-3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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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시내 중심부인 동서금동(東西錦洞)에 위치한 도시공원(都市公園)의 하나, 바다를 향해 시내에서 돌출(突出)한 언덕이며 언덕 위에는 잘 다듬어진 잔디밭과 시민(市民)의 산책로(散策路)가 잘 정비되어 있다.

또한 이곳에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늠름한 모습으로 삼천포 앞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고 6.25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몸바친 반공애국청년(反共愛國靑年)들의 반공전적비(反共戰績碑)가 서 있으며, 우리고장의 서정시인 박재삼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 노산공원(魯山公園) 남단(南端)의 바닷가 바위 위에는 목조(木造)로 정자(亭子) 하나를 지어 놓았는데 이 정자 위에 서면 한려수도(閑麗水道) 물길의 전망이 시원스레 한눈에 들어온다.

따라서 이 공원에는 사시사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책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뿐 아니라 외지(外地)에서 사천시를 찾는 사람이면 꼭 한번씩은 들렀다 가는 곳이다. 공원(公園)아래는 생선횟집들이 즐비하여 더욱 싱싱한 미각(味覺)을 돋우고 있다.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
명칭 독립기념관
주소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남화리 230번지
전화번호 독립기념관(041-560-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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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독립기념관은 외침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 독립을 지켜온 우리 민족의 국난 극복사와 국가 발전사에 관한 자료를 연구하고 전시함으로써 국민의 투철한 민족정신과 국가관을 정립하는데 이바지하기 위하여 온 국민의 성금으로 목천읍 남화리 120만여 평의 부지위에 1987년 8월 15일에 세워졌으며, 겨레의집, 겨레의 탑, 통일 염원의 종 등이 있다.

충무공이순신장군 동상
충무공이순신장군 동상
명칭 충무공이순신장군 동상
주소 진해시 도천동 13 번지 소재 (북원로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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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도시계획에 따라 잘 정돈된 정연한 진해는 북원로터리에 이충무공 동상, 중원로터리에 분수,시계탑, 모형거북선, 남원로터리에 김구선생의 친필 충무공 시비가 있었으나 중원로터리는 2007년 잔디광장으로 조성하였다.

북원로터리의 이충무공동상은 전승지 남해를 굽어보고 있다. 이 동상은 6.25동란의 참화속에서 국가적 사업으로 건립된 것인데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50년 11월 11일 진해 해군통제부 사령관 김성삼 소장은 해군 창설 제5주년 기념식장에서 식이 끝난 다음 그 기념식에 참석한 경상남도 지사 양성봉과 그 밖의 다수 유지에게 이충무공 동상 건립의 필요성 역설하였다. 그러자 참석자 모두 이에 찬성하여 그 해 11월 19일 마산 시장실에서 사령관 김성삼을 비롯하여 군항에 가까운 각 시,군,읍장과 각 기관 책임자가 모인 가운데 마산시장 강봉용을 회장으로 하는 동상건립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마산시를 비롯한 창원군, 통영군, 고성군, 김해군 등에서 각출한 3천만원의 건립기금으로써 그 해 12월 8일 한국 조각계 권위자인 윤효중을 초빙하고 곧 착공하기로 하였으나 마침 정국의 돌변으로 1주일 뒤에 부득이 동상 건립을 중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성회에서는 초지를 굽히지 않고 충무공의 모형만이라도 제작하기로 결정하고 430만원으로 모형제작에 착수하였으나 이충무공의 초상이 전하여지는 것이 없으므로 면모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난관에 봉착하였다. 윤효중은 여러 문헌상에 나타난 그의 생활과 자손의 골상을 조사하고 문무를 겸비한 상으로 고심한 끝에 독자적인 모습을 창안하였다.

1951년 3월 말경 처음으로 모형의 제작이 끝나게 되자 최남선, 이은상, 김영수, 권남우, 김은호 등 이 방면 권위자들이 감상 비평한 결과 만족할 만한 평을 얻지 못하여 3차례에 걸쳐 계속 연구와 고심 끝에 4월 19일 비로소 모형을 완성하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모형을 완성하게 되자, 기성회장 강봉용과 작가 윤효중 사이에 총 경비를 45,418,800원 (토대공사비는 별도) 으로 체결하고 윤효중은 원형제작에 힘쓰는 한편 7월 1일에 정초식을 올리고 9월 30일에는 동상 상형의 완성을 보아 당시 신익희 (민의원 원장), 안호상, 홍종인을 비롯한 미술계, 사학계의 권위있는 인사를 초청하여 제1차 상형평의회를 열고 10월 7일에는 제2차 평의회를 개최한 결과 의견일치를 보았다.

작가 윤효중은 11월 15일 높이 16자의 원형 제작을 완료하고 이어 해군공창에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대 주조작업에 착수하여 다음 해 3월 28일에 건조가 끝났다.

이러한 어려운 과정을 밟은 이충무공 동상 제막식은 1952년 4월 13일(임진왜란 발발일),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요인과 내외귀빈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거족적으로 성대히 거행되었다.

동상의 앞면에는 ‘忠武公 李舜臣像 李承晩 謹書’ 라고 이승만대통령이 쓰시고, 뒷면에는 아래와 같이 노산 이은상 선생의 찬문이 쓰여있다.

김구선생 친필 이충무공 시비
김구선생 친필 이충무공 시비
명칭 김구선생 친필 이충무공 시비
주소 진해시 태평동 103 소재 (남원로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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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해군사관학교 입구 남원로터리 중앙에 화강암 입석비가 있다.
비문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시 “誓海漁龍動 盟山草木知 (바다에 맹세하니 고기와 용이 움직이고 산천에 맹세하니 초목이 알더라)” 를 음각하였다.

측면에는 ‘대한민국 二十九年 八月 十五日 金九’ 라 음각되어 있다. 해방 후 귀국한 김구선생이 1946년부터 3남지방을 순회할 때 첫 방문지로 손원일제독의 초청을 받아 진해에 와서 남긴 글이다.
처음에는 북원로터리에 세워졌으나 이승만대통령 재임기간에는 진해역사에 있다가 하야 후 현 위치에 다시 세워졌다. 비의 높이는 282㎝, 폭 44㎝의 입비이다.

해군 사관학교박물관
해군 사관학교박물관
명칭 해군 사관학교박물관
주소 진해시 앵곡동 사서함 88-1
전화번호 055) 548-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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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은 충무공 이순신의 애국애족정신과 그의 위대한 해전활약상, 선조들의 해양활동 역사를 해군장병과 사관생도들에게 교육시킬 목적으로 한국해군에 의해 설립되었다.

해군사관학교는 1946년 1월 17일에 창설된 이후부터 충무공 이순신에 관한 문헌 자료를 수집하여 도서관 내에 임시로 전시실을 운영하여 오던 중 1976년 1월 17일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을 건립, 신축과 증축을 거쳐 1990년 4월 28일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박물관의 시설로는 전시실, 관장실, 기획실, 관리실, 자료실을 갖추고 있으며 총 넓이는 2,622㎡이다. 전시실은 이 충무공실, 해군 해양실, 해사실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 충무공실은 충무공 이순신의 생애를 표현한 전시실로서 공의 행장, 공의 초상화, 공에 관한 각종 문헌, 임진 왜란 각종 무기, 선박의 그림 등 모두 212점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해군 해양실은 대한민국 해군의 역사를 표현하기 위해 중국 원나라 청자, 조선 시대의 무기, 지도 등 모두 319점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으며 해사실은 해군사관학교의 기념자료 315점을 전시하고 있다. 이처럼 선조들의 해양 활동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다양한 학습 자료들이 있어 연간 20여만 명의 관람객이 내방하고 있으며 특히 군항제 기간에는 상시 출입이 가능하여 많은 관람객이 찾고 있다.

관람 희망자는 사전에 해군사관학교 인사행정처 보안과(055)549-5029에 연락 출입허가를 받아야 한다.

실물모형복원 거북선
실물모형복원 거북선
명칭 실물모형복원 거북선
주소 진해시 앵곡동 사서함 88-2-6 (해군사관학교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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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거북선은 임진왜란 직전에 이순신장군에 의해 판옥선을 개조하여 제작되어 조선 수군의 돌격선으로 활약한 전선으로 안골포해전과 웅포해전 시에도 3척이 출동하였다.

이순신장군은 임진왜란 초 전라좌수영의 본영에서 건조한 영귀선, 방답진에서 건조한 방답귀선 및 순천부에서 건조한 순천귀선 3척을 전투에 활용하였으며 사천해전시에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하였다. 3년뒤인 1595년에는 5척으로, 영조 때에는 14척, 순조 때에는 40척으로 늘어나면서 점차 대형화되었다. 이 거북선은 1980년 1월 31일 한국 해군이 학계의 고증을 거쳐 복원 건조한 것인데, 그 제원은 다음과 같다.

전장 34.2m (113척)
선체높이 6.4m (21척)
선 폭 10.3m (34척)
흘수 1.4m (4.5척)
함 포 수14
문승조원 130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