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선양

  • 명언·명시
  • 충무공 5대정신
  • 이순신 리더십
  • 주요 전유적지 현황
  • 이순신연구 및 선양기관

이순신 리더십

  • HOME
  • 충무공 선양
  • 이순신 리더십

이순신의 위민(爲民) 사상

이순신의 『난중일기』 정유년(1597) 8월 6일자에 보면 “...옥과 경계에 이르니 순천, 낙안의 피난민들이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살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사흘 후인 8월 9일자에는 “...길가에 노인들이 늘어서서 다투어 술병을 바치는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억지로 권했다.”라고 적혀 있다. 당시 백의종군에서 사면되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이 수군을 재건하고자 순천으로 갔을 때의 상황이다. 백성들이 이순신의 통제사 복직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어서 다행스러워 하는 모습을 묘사한 대목이다.

한편 『조선실록』에서 이덕형은,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군량을 운반하던 인부들과 노약자들도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처럼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마지막 해인 무술년(1598)에 대명외교 관련 업무 차 순천에 와 있던 좌의정 이덕형이 이순신의 전사 직후의 상황을 목도하고 선조임금에게 보고한 대목이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이순신이 백성들로부터 어떤 인식을 받았는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7주갑 전에 발발한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이 조선수군이었고 그 활동의 중심에 이순신이 있었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다. 이순신이 이끈 조선수군이 40여 회의 전투에서 승리한 비결은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다. 조선수군의 우수한 전선과 화포의 위력, 능력과 충성심을 겸비한 부하들의 활약, 이순신 자신의 뛰어난 리더십과 전략전술 등이 어우러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인들의 근간에는 백성들의 조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특히 수군상황이 열악했을 때 백성들의 도움은 더욱 빛났다.

임진왜란 초기 경상도의 수군 방어체계가 미비한 상황에서 적정(敵情)에 대한 정보입수는 백성들에게 의존하는 바가 컸다. 적을 처음 맞이하는 옥포해전에서는 적정 파악과 아군의 사기진작을 위해 바다의 유랑어민들이 탄 포작선을 46척이나 참여시켰다. 그리고 한산도 해전 하루 전에는 목동 김천손이 견내량에 있던 적정을 알려줌으로써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정유재란을 맞아 칠천량해전에서 수군력이 궤멸되다시피 한 이후 백성들의 조력은 수군에게 더욱 긴요한 힘이 되었다. 전선과 무기, 군량미를 확보하는 데 백성들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치른 명량해전에서는 피난선이 100여 척이나 동원되어 후방에서 성원 하였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절대열세의 명량해전에서도 승리하였다. 명량해전 이후에는 명 수군과 대등한 관계에서 연합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단기간에 걸친 수군력 증강에 백성들은 신명을 바쳐 참여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결국 노량해전의 큰 승리로 귀결되었고, 임진왜란의 대미를 훌륭하게 장식하는 기반이 되었다.

당시의 지휘관들은 ‘적을 막는 이유는 백성들을 보호하는 데 있다’(어적보민(禦敵保民))는 군의 존재 이유를 잘 알고 이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순신은 이러한 개념 외에 한 차원 높은 생각을 가졌다. 백성을 보호의 대상뿐만 아니라 상호 도와야할 대상으로도 본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적을 막고 백성을 보살피는 길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전쟁수행 체계가 미비하고 군수지원이 어려웠던 시절에 백성들의 도움은 실로 절대적이라는 점을 안 것이다.

이와 같이 임진왜란 극복은 국민총력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성들의 피땀어린 노력이 있었기에 조선수군의 위대한 승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백성들과 함께 전쟁을 수행한 이순신의 탁월한 리더십과 위민정신이 결합된 것이다. 해군과 국민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임을 역사는 알려주고 있다.


이순신의 통합적 사고와 명량해전

충무공 이순신의 일생 중 가장 어려운 시기를 꼽는다면 명량해전 직전의 열흘간일 것이다. 즉 벽파진해전이 있었던 1597년 9월 7일부터 명량해전이 벌어진 9월 16일까지의 기간이다. 이 열흘 동안은 이순신이 패잔전선 13척을 이끌고 벽파진에 머무르면서 점차 압박해오는 수백 척의 일본함대를 맞아 전투를 준비하던 기간이었다.

당시 조선수군은 7월 16일의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하여 불과 10여 척의 전선만 남은 상태였다. 8월 3일 경상도 진주에서 통제사로 재부임한 이순신은 이 빈약한 세력의 전투력을 최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40일도 채 되지 않는 기간이지만 이순신은 순천과 보성을 거치면서 군사들을 모으고 무기와 군수물자를 확보하는 힘겨운 노력을 기울였다. 8월 19일 회령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의 전선 10여 척을 인수 받은 후 어란포에서 일본군 선발대 8척과 접전하여 승리를 거두고 벽파진으로 진을 옮겨 9월 7일에는 일본군 선봉함대 13척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함대는 8월 16일 육군과 함께 남원성을 함락시킨 후 전라도 해안을 서진하고 있었고 그 규모는 수백 척이었다.

조선수군은 일본함대의 선발대를 요행히 물리쳤지만 수백 척의 본 함대와의 접전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판단할 때 이 전력으로는 수십 배가 넘는 일본함대를 물리칠 방법이 없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이순신은 포기하지 않았다. 통합적 사고를 통해 모든 가능성을 면밀히 분석하여 승리의 방안을 강구하였다. 이를테면 이전 전투사례를 모두 분석하여 적의 전술을 면밀히 파악하고 아군의 전력을 진단하여 부족한 점을 보완하였다. 주변의 지형지물과 해상환경에 대한 관찰을 통해 전투장소를 물색하였다. 동시에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전의를 고양하기 위한 노력도 경주하였다. 정보망을 가동하여 적정을 실시간 보고받으면서 이순신 스스로도 갑옷을 벗지 않고 침식을 최소화하면서 솔선수범하였다. 이렇게 다각도로 방안을 강구하여 승리 방안을 마련한 결과 최적의 전투지로 명량수로를 선택하였다.

이순신의 이러한 노력에 하늘도 감응하였던지 9월 15일『난중일기』에는 “이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싸움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이순신의 통합적 사고는 결실을 맺어 다음날인 9월 16일에는 청사에 빛나는 명량해전의 승리를 이루었다.

결국 조선수군의 명량해전 승리 이면에는 통제사 이순신의 노심초사 승리를 위한 염원과 함께 통합적 사고가 발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시공을 초월하여 어떠한 위기 상황이 닥치더라도 통합적 사고로 최선의 방안을 강구하여 실행한다면 목표는 분명히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이순신은 가르쳐 주고 있다.


이순신 소통의 리더십

이순신은 임진왜란이라는 민족 미증유의 전쟁을 맞아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심초사 진력하였다. 특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지 20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발발한 전쟁이다 보니 전쟁수행 체계가 너무나 미비하고, 빈한한 나라 사정으로 군수물자도 부족한 가운데 전쟁을 극복해야 했다. 이러한 사정을 파악한 이순신은 모든 조직과 신분을 막론하고 상호 소통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조정과 동료 수사, 부하와 백성은 물론 참전 명군 장졸까지 모든 계층, 신분을 막론하고 소통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조정의 관련 부서와 계속적인 서신왕래와 인편을 통한 상황보고를 통해 수군의 현황을 정확하게 전달하여 긴요한 부문에 대한 지원을 이끌어내었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동료 수사와의 원활한 협조를 위해 수시로 만나 현안에 대한 협의를 함으로써 작전의 성공을 이루었다. 평소 부하들과 끊임없는 대화와 배려, 보살핌으로 전투 시에는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승리를 거두었다. 백성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도와줌으로써 백성들로부터 적정에 대한 정보제공도 받고 전선 건조와 무기 생산, 군량미 확보에도 큰 도움을 받았다. 전투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명군 장졸들과의 소통을 통해 그들의 전투현장에 이끌어 내었고 효율적인 연합작전을 이루어 노량해전에서의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와 같이 이순신은 각계각층, 신분고하를 막론한 소통을 통해 불패의 신화를 이루었다. 이순신은 비록 400여 년 전의 인물이지만 그분의 훌륭한 정신과 리더십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는 마음을 열고 끊임없는 대화와 단합으로 소통을 이루어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보람 있고 멋진 군 생활을 영위하면서 우리의 임무도 잘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평상시에 소통이 잘 이루어지면 유사시에 단합된 힘으로 분출되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리더십의 요체는 스토리텔링!

스토리텔링이란 상대방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를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행위이다.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함으로써 자칫하면 인간성을 상실할 수 있는 현실에서 스토리텔링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수단으로 인정받고 있다.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우리는 역사와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되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이를 통해 인생을 풍요롭게 살 수 있다.

미국의 로버트 맥기(Robert Mckee, 71세) 서던캘리포니아대 교수는 스토리텔링의 대가이다. 그는 스토리텔링이란 ‘우리의 작은 삶을 확장시켜 주는 훌륭한 장비’라고 하였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아주 작지만 스토리를 통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험을 수천, 수만 번 반복하면서 우리의 작은 삶은 확장한다고 그는 말했다.

아울러 리더십에도 스토리가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리더십의 요체는 상대방을 설득하고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스토리텔링입니다. 팩트(사실)만 나열해서는 상대방의 생각을 바꿀 수가 없어요. 데이터는 숫자일 뿐입니다. 리더는 팩트들을 갖고 이야기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거야. 지금은 이렇지만 내일은 이렇게 바뀔거야’라는 식으로 말입니다...리더는 이야기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나쁜 리더는 명령을 내리고 협박하고 조작하지만, 좋은 리더는 사람들에게 인간 대 인간으로 말하고 이해시킨다고 강조하였다.

우리 역사상 맥기교수가 말한 스토리텔링의 대가에 적합한 인물을 꼽는다면 단연코 충무공 이순신을 들 수 있다. 이순신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라도수군을 이끌고 경상도로 출동하기에 앞서 경상도로 출동하는 당위성에 대해 역설하였다. 경상도로 나아가 싸우는 것이 곧 전라도를 온전하게 지키는 일이고 조선수군은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하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였다. 그 결과 초기해전에서 전승을 거두었다. 또한 명량해전 직전에는 적에 비해 절대열세의 상황이었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산다는 자신감을 병법서의 사례와 현재의 상황을 활용하면서 부하들에게 심어주었다. 그 결과 13척의 전력으로 130여 척의 적을 물리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와 같이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부하설득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조직의 목표달성에 매우 중요한 리더십 기법임을 알 수 있다. 시간이 갈수록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우리 모두 유능한 스토리텔러가 되기 위해 노력해 봅시다.


이순신의 음주(飮酒)는 소통의 수단

임진왜란 중인 1593년 8월부터 삼도수군통제사 제도가 운용되었다. 이때부터 통제사 이순신 지휘 하에 전라?충청?경상도의 삼도수군은 한산도에 진을 친 가운데 일본군의 해상 서진을 막았다. 이순신은 각 도의 수군을 한산도 주변 요지에 배치하여 해상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그로부터 2년 7개월이 지날 무렵인 1596년 2월 30일(음)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통제사 이순신을 찾아와 소속 부하들과 함께 본영인 전라우수영(해남)에 가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억기로서는 너무 오랫동안 본영을 비워두었기에 강화교섭이 절정에 달한 틈을 타서 다녀오겠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요청에 대해 이순신은 날이 풀려 적의 해상활동이 활성화될 것을 예상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아울러 이순신은 이억기의 요구가 다분히 감정적인 요인이 있다고 보고 벌을 주는 차원에서 이억기의 군관 및 도훈도(都訓導)에게 곤장 70대를 쳤다.

이억기는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관할 구역인 견내량에 가서는 상관에 대한 불만스러운 심정을 주변에 표출하였다. 이러한 이억기의 행동에 대해 이순신도 전해 들어 알게 되었다.

이억기를 징계한 이순신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난중일기』병신년(1596) 3월 2일자에 “몸이 몹시 불편하여 공무를 보지 않았다. 몸이 노곤하고 땀이 흐르니 이것은 병이 날 조짐이다.”라는 표현이 이를 대변한다.

이억기는 이순신 보다 나이는 16살이나 어렸지만 관할 구역은 전라좌수영의 2배가 될 정도로 넓었다. 그동안 이순신과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수군을 잘 이끌어 온 지휘관이었는데, 이번 일로 이순신과의 관계가 불편해 진 것이다.

이순신은 이억기와의 갈등을 해소해야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다음날(3월 3일)에는 군관 송희립을 이억기에게 보내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랬더니 이억기 역시 불편했던 마음이 많이 누그러졌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이순신은 직접 이억기부대를 방문하였다. 3월 5일 아침 무렵 도착한 이순신은 이억기를 만나 다시 한 번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이억기 역시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였다. 상호 화해한 후 함께 술을 마셨다. 이때 이순신은 잔뜩 취할 정도로 과음하였고, 이억기 역시 잔뜩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다. 이후 이순신과 이억기의 관계는 예전의 정상적인 관계로 환원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듯이 평소 가까웠던 사람과 사이가 나빠지면 당사자는 엄청난 심적 고통을 받게 된다. 사이가 친밀했던 사람일수록 그 고통은 배가될 것이다. 더욱이 생사를 함께하는 전우들 간에 불편한 관계는 유사시 전투력 발휘에 저해요소가 된다. 이순신은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는 이억기와의 불편한 관계를 과음을 하면서까지 해소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이순신의 소통 리더십 교훈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이순신의 애민(愛民) 리더십

전라남도 여수는 조선시대 전라좌수영이 있었던 곳이다. 흔히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의 본영으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현재 전라좌수영의 흔적으로는 객사 역할을 한 진남관이 우뚝 서 있고 그 동편 언덕엔 고소대가 있다. 이 고소대에는 3개의 비갈(碑碣)이 세워져 있다. 타루비와 전라좌수영대첩비, 그리고 두 비의 건립경위를 새긴 동령소갈이다. 이 중 타루비는 이순신을 따르던 장수들이 1603년 가을에 세운 것인데 조선시대 최초의 이순신관련 기념비이다.

‘타루(墮淚)’라는 명칭은 눈물을 흘린다는 뜻으로 중국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국의『진서(晋書)』‘양호전(羊祜傳)’에 의하면 진나라 때 양양지방의 태수 양호는 오나라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면서 백성도 잘 보살폈다. 그의 덕을 사모한 양양 사람들이 현산 위에 비를 세우고는 언제나 그 비를 보고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그 비를 타루비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양호가 그랬듯이 이순신도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백성을 잘 보살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순신은 바다에서 적을 물리친 뛰어난 무장일 뿐만 아니라 백성으로부터 존경도 받은 훌륭한 리더였던 것이다.

우리 역사상 가장 큰 국난인 임진왜란을 극복한 데는 조선 수군이 가장 크게 기여하였고, 그 중심에 이순신이 있었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는 어떻게 하여 이런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 당시 조선 수군의 전선과 무기체계가 일본군에 비해 우수했다는 점, 조선 수군의 전술이 뛰어났다는 사실과 각자 맡은 바 역할을 다한 수군 장졸들의 적극적인 참전, 그리고 백성들의 조력이 기여한 바일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이러한 제 요인들을 관리하고 통합한 이순신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런데 이순신의 리더십이 제대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요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순신의 전략사상 속에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순신은 전쟁의 와중에 가장 고통을 받는 계층이 힘없는 백성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백성의 안위를 보살피는 데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는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이순신은 고통 받는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을 물리쳐야만 했다. 그는 뛰어난 전문성과 통찰력을 근간으로 혁신적인 사고와 행동을 보였다. 당시 다른 무장들은 일본군의 장기가 해전이라 생각하고 육지에서 싸우고자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피아간의 상황을 잘 파악한 후 준비만 잘하면 바다에서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더욱이 적이 상륙을 허용하면 그 순간부터 백성들은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보고는 해전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 주력 전선인 판옥선과 총통으로 대변되는 화포의 정비는 물론 특수전선인 거북선을 창조하였다. 일본군의 능력과 전술형태를 예상하고 미리 대비를 하였다. 이순신은 어릴 때 충실히 닦은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난해한 병법서를 섭렵하고 달통한 전략가였다. 병법 원칙을 적절히 적용하여 수군을 지휘하고 운용하였다. 그는 병법서에 있던 육전 위주의 다양한 진법들을 바다에서 적절한 진형으로 창조하였다.

그는 휘하 장졸들이 전투에 적극 참가하여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도록 다양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경상도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았을 때 휘하 장수들의 의견을 물은 후 그 뜻에 따라 출전여부를 결정하였다. 삼도수군이 통제영에 모여 있을 때 계급이 낮은 군졸들로 부터도 작전에 적절한 제안일 경우 적극 반영하였다. 1594년의 당항포해전 같이 여유가 있을 경우 자신의 권한을 적절히 위임하기도 했다. 명량해전 직전의 어려운 상황에서는 솔선수범하여 선봉에서 부하들을 이끌었다. 이렇게 했기에 부하들은 불만이 없었고 작전에도 실패가 없었다.

이순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수군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정유년 초기 일본의 간계에 속은 조정에서 부산 앞바다로 출동을 명령했을 때 이순신은 출전할 경우 예상되는 피해를 고려하여 출전하지 않았다. 출전하여 조선 수군 전부를 잃는 것보다 혼자만의 희생을 선택함으로써 사형을 당할 뻔한 고초를 겪기도 했다. 경상도 초계의 도원수 휘하에서 백의종군중일 때도 사형을 당할 번한 고초를 겪기도 했다. 경상도 초계의 도원수 휘하에서 백의종군중일 때도 수군 상황에 대해 지속적으로 파악하였다. 자신의 억울한 처지에 대한 자괴감에 도취된 채 세월을 허송하기보다는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대승적 차원의 의지가 더 크게 작용한 것이다. 그랬기에 칠천량해전 직후 통제사에 재임명되었을 때 신속하고 적절한 수군정비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이것은 곧 명량해전의 승리로 이어졌다.

이순신의 백성에 대한 사랑은 해전을 수행하는 와중에도 끊이지 않았다. 한산도해전에서 적을 넓은 바다로 유인한 것은 유사시 적들이 육지에 올라 백성에게 해를 끼칠까 염려한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안골포해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해전에서는 육지로 도망간 적에게 소규모의 운송수단은 남겨두었다. 퇴로가 봉쇄당해 악에 받친 적들이 육지에 올라 우리 백성에게 해를 끼칠까 염려해서였다. 적선을 나포한 후에는 혹시 포로로 붙잡힌 우리 백성이 있지 않은가 철저한 조사 후 불태워 없앴다.

이순신 대민관의 특징 중 하나는 백성들을 단순히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전쟁을 극복해야 할 동반자로 보았다는 것이다. 수군의 형편이 열악하고 군수지원체계가 미흡할 때 여력이 있는 백성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것이 진정으로 적을 막고 백성을 보살피는 길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이순신을 신뢰한 백성들은 적에 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수군지휘부에 알려주었다. 한산대첩의 승리는 한 백성의 정보제공에 힘입은 바가 컸다. 군량미 확보를 위해 둔전 경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여수의 돌산도를 비롯한 여러 곳에 설치한 둔전에서 군량미를 마련하는 데 힘써 노력하였다. 수군세력이 약할 때는 기꺼이 후방에서 성원하였고, 심지어 전투에까지 참여하였다. 극적인 승리를 거둔 명량해전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명량해전 후 13척뿐인 빈약한 수군력을 강화하기 위해 수군 재건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불과 8개월 동안 고하도와 고금도를 거치면서 60여 척의 전선을 건조할 수 있었다. 수군 인력이 부족한 사정을 알고는 자원하여 입대하였다. 그 결과 명 수군과의 연합작전에서 조선의 국가이익을 지킬 수 있었다.

이순신의 애민 리더십은 명군과의 연합작전에서도 발휘되었다. 명군이 고금도에 왔을 때 적절한 환대로 상호간에 화합을 도모하였다. 와중에 포악한 명군에 의해 백성들의 피해가 발생했을 때는 과감하게 진을 철수하겠다는 위협을 가해 명군으로부터 재발방지 약속을 받기도 했다. 우리의 잔존심을 지켜나가는 한편으로 전투에 소극적이던 명 수군을 전투현장에 이끌어내어 노량해전의 대승을 이루었다.

결국 부하와 백성을 사랑하는 이순신의 리더십은 휘하 장졸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였다. 충청, 전라, 경상도의 삼도수군이 한 곳에 모여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서 한마음이 되었다. 그가 발휘한 사랑의 리더십은 휘하 장졸들의 갈등을 해소시켰다. 다양한 지역과 신분계층임에도 이순신 휘하에서 일사불란하게 전투에 임해 40여 회의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종전을 앞둔 시점에 순천에 내려와 있던 좌의정 이덕형은,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군량을 운반하던 인부들과 노약자들도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기까지 하였으니, 이 처럼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라고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남해 충렬사의 ‘노량묘비’ 문에도 ‘이순신의 운구행렬이 아산으로 향하는 연도에는 수많은 백성이 나와서 애통해 하였다’고 새겨져 있다. 이것은 누군가의 주도로 이런 상황을 설정한 것도 권유한 것도 아니다. 백성들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그 만큼 이순신은 모든 지역의 백성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은 분임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리더십이 주는 최대의 교훈은 모두가 하나 되어 나라를 지켰다는 것이다. 반목과 분열이 일상화 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리더십은 바로 이순신의 애민 리더십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순신, 전공보상(戰功報償)의 리더십

“28일 적이 성을 포위했다가 2일 포위를 풀고 물러갔습니다.”

위 문구는 임진왜란 시 초토사 이정암(李廷?, 1541~1600)이 연안성(延安城) 대첩을 이룬 후 올린 보고서의 전문(全文)이다. 1592년 8월 28일부터 9월 2일까지 나흘간 황해도 연안성에서 의병 5백 명으로 일본군 3천명을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투가 끝난 후 해당 지휘관은 전투결과를 상부에 보고한다. 전투 상황에 대한 전말을 수록하여 보고함으로써 그 전투의 상황에 대한 상부의 이해를 돕고, 전체 전황을 조율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동시에 이 보고서를 통해 전공자에 대한 포상도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정암은 이 전투보고를 딱 한 줄로 끝내버렸다. 이 전투가 어떠한 상황에서 벌어졌는지, 적에게 입힌 타격이 얼마나 컸는지, 누가 전공을 세웠는지, 아군의 피해는 또 어느 정도였는지, 단 한마디도 언급이 없었다.

한 줄짜리 보고서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연안성전투의 내막이 조정에 알려졌다. 이정암이 몇 배가 넘는 정예일본군과 맞서 싸워 나흘간을 버텨냈고 결국 그들을 격퇴하는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는 것이었다. 조정의 많은 신료들은 이정암의 한 줄짜리 장계를 겸손이라 생각하고 이구동성으로 칭찬했다고 한다.

반면에 이순신의 장계는 사안에 따라 다르지만 임진년 해전에 대한 보고서는 매우 길었다. 임진년의 4차에 걸친 출전 장계를 번역본으로 그 분량을 통계 내어 보면, 1차 옥포승첩계본 11장, 2차 당포승첩 계본 20장, 3차 한산도승첩 계본 14장, 4차 부산포승첩 계본 8장 등이다. 평균 13장 정도이다. 이렇게 이순신이 장문의 보고서를 쓰게 된 것은 전투의 배경과 경과, 적군의 피해상황과 아군의 전사자 및 부상자 명단, 노획물 목록 그리고 전공자명단에 포상등급까지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정암은 나라가 위태로우면 구성원으로서 적을 막는 것이 당연한 임무라고 생각하고 간단하게 보고했지만, 이는 전쟁을 지휘하는 조정에게나 참전 장졸들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정으로서는 상세한 전황보고서를 통해 전체 전황을 파악하고 향후 전쟁방향을 결심할 수 있다. 참전 조직의 구성원들은 자기 행위의 결과에 대해 보상을 받고 싶은 심리가 있을 것이다.

이순신 올린 보고서는 매우 상세했기에 해전에 대한 조정의 이해를 도왔다. 동시에 참가 장졸들의 공적과 피해가 고스란히 들어있기에 조정으로부터 그에 상응한 포상과 위로가 이루어졌다.

지휘관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에 겸손도 한 요소일 것이다. 그러나 전생 시 전투조직을 이끄는 리더라면 겸손보다 전황을 궁금해 하는 상부조직과 보상을 기대하는 조직구성원의 입장을 고려하는 보다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이런 면에서 이순신은 연전연승할 수밖에 없었던 위대한 전투형리더라 아니할 수 없다.


이순신의 만전지계(萬全之計) 리더십

만전지계(萬全之計)의 사전적 의미는 아주 안전하거나 완전한 계획 또는 계책을 말한다. 이순신의 수군활동을 살펴보면 모든 일에 만전지계를 다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수군의 전선수가 열악한 상태였기에 한순간 방심하면 조선수군의 존재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만전지계의 사례는 임진왜란 첫 번째 출동을 앞두고 전력을 구성하는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임진왜란 발발 1년 2개월 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전쟁을 대비하여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 판옥선을 정비하고 신형전선인 거북선도 건조하였으며 각종 무기와 군기(軍器)를 정비 또는 보수하였고 좌수영 성 자체의 방어를 위해서도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그런 가운데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였고 이틀 후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구원요청을 받았다. 경상우수영이 함락되고 일본군이 경상도지역을 침략하고 있는 상황에서 몇 척 밖에 없는 경상우수군의 힘으로는 적을 막을 수 없었다.

구원요청을 받은 이순신은 관할 구역은 다르지만 경상도를 지키는 것이 전라도를 지키는 가장 효율적인 방책임을 인식하였다. 조정으로부터 출전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이순신은 출전을 위해 보유 함선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당시 전라좌수군에는 주력 전투선인 판옥선은 24척 뿐이었고, 보조선인 협선이 15척 있을 뿐이었다. 거북선은 아직 전력화되지 못한 상태였다.

일본군이 90여 척 단위로 움직인다는 첩보를 들은 이순신은 이 전력으로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였다. 그래서 전투선 외에 포작선 46척을 동원하였다. 포작선은 포작(鮑作)들이 타는 배로 일종의 어선이라고 볼 수 있다. 포작들은 바다를 정처 없이 유랑하면서 어로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평소 해로에 익숙하여 적의 이동경로에 대한 전문성을 갖고 있었다. 아울러 이들은 원시적인 형태나마 나름의 자체 방어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순신이 포작선 46척을 동원한 것은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아군의 세력이 적에 비해 너무 열악하므로 외형적으로 나마 대등한 세력을 형성하여 아군의 사기를 진작시키자는 것이었다. 포작선 46척을 포함하면 전라좌수군은 총 85척이었고, 원균의 6척을 합하면 총 91척으로 적과 대등한 규모를 갖출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경상도 출동은 처음이므로 경상도 해로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만 했는데 포작들을 통해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포작들은 경상도 수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기에 적정 탐색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만전을 다한 준비로 첫 해전인 옥포해전부터 마지막 노량해전까지 수십 회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전승무패의 신화는 이러한 만전지계의 리더십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훈은 현실에서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호랑이가 토끼를 잡을 때 최선을 다한다고 하듯이 모든 일에 만전을 다한다면 소기의 성과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이순신의 인맥관리 리더십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40여 회의 해전에서 전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의 인맥관리에 힘입은 바도 크다. 이순신의 승리를 도운 인맥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조정에서 이순신을 도와준 인물들이다. 유성룡은 이순신을 정읍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천거하였고, 영의정직에 있으면서 이순신의 정책건의를 수용하여 이순신이 포부를 마음껏 펼치도록 도왔다. 정탁은 예지력과 인재식별 능력이 뛰어났으며, 이순신이 투옥되어 생사기로에 섰을 때 ‘신구차’를 올려 목숨을 구했다. 전시 최고위 직책인 도체찰사 임무를 수행한 이원익은 이순신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조정에 정확하게 전달함으로써 이순신의 임무를 돕고 그의 위상을 높였다.

둘째는 동급레벨에서 이순신을 도운 인물들이다. 정걸은 78세의 고령에도 이순신의 조방장을 자처하여 수십 년간 근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노하우를 전수하였다.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이순신보다 16세나 어렸지만 동급의 수사로서 이순신 함대의 한 축을 차지하면서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수행하였다.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은 이순신과 불과 4개월간 함께 있었지만 이순신의 인품과 능력에 탄복하여 이순신의 활동을 적극 도와 노량해전에서의 대첩을 거두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셋째는 이순신 휘하에서 승리를 도운 사람들이다. 정운은 항상 선봉에 서서 적을 섬멸하는 데 중추적인 활동을 한 인물이다. 권준은 이순신의 마음을 읽으며 이순신의 전략을 보좌함으로써 전체 전황을 조율하였다. 어영담은 경상도지역으로 출동 시 물길을 인도하였고 전과 면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다. 동명이인 이순신(李純信)은 성실하게 중요한 이릉ㄹ 잘 처리하였으며, 한산도해전 시 유인작전을 잘 구사하여 해전 승리에 일등공신이 되었다. 배흥립은 초기해전에서도 전과가 컸으며, 칠천량해전 이후 수군재건 시 이순신 측근에서 가장 심력을 다한 인물이다.

김완은 진중의 활력소 역할을 하였고, 장사 수완이 좋아 수군의 군량확보에 기여한 공이 컸다. 이순신의 감조군관이었던 나대용은 거북선을 제작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화약제조 비법이 비밀리에 전수되던 시절 이봉수는 전라좌수군의 화약 제조를 담당한 최고의 화기전문가로 활동하였다. 정사준은 조선의 승자총통이 일본의 조총보다 단점이 많은 것을 인식하고는 보좌하였고, 노량해전에서도 이순신 사후 처리를 담당한 최측근이었다. 이순신의 종사관으로 근무한 정경달은 이순신이 해상 작전을 나간 후 이순신의 업무를 완벽히 대행하였다.

결국 임진왜란 극복의 동력은 이순신 주변의 인맥들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주변에는 어떤 인맥들이 있습니까?


이순신의 자존(自尊) 리더십

‘자존(自尊)’이란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자기 몫이나 품위를 스스로 높이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렇게 하려는 마음을 익숙한 용어로 자존심이라고 부른다. 한국 해군의 위대한 선배이신 충무공 이순신은 임진왜란 시기 적을 물리치는 와중에도 조선 수군으로서의 자존을 지켰다.

정유재란기 조선 수군은 칠천량해전에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후 통제사직에 복귀한 이순신의 주도 하에 불과 13척의 전선과 1000여 명의 병력으로 명량해전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명량해전 이후가 문제였다. 불과 13척의 전력으로는 남해상의 제해권을 되찾을 수가 없었고, 더욱이 명나라 수군의 대규모 참전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제사 이순신은 무엇보다 수군력 재건이 필요함을 인식하였다.

이순신이 수군력 재건을 추진한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하나는 적을 물리칠 수 있는 전력을 구비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가올 명 수군과의 연합작전에서 조선 수군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명수군 함선 수백 척이 참가할 경우 명군의 힘에 의지하여 전투를 수행할 수 있겠지만 그럴 경우 조선 수군은 명 수군에 흡수되다시피 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조선의 국가이익을 위해 존재할 수군이 명나라의 전쟁 수행 목적을 달성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는 상황을 예상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순신은 명량해전 이후 겨울이 왔지만 장졸들을 이해시키고 인근 백성들에게도 협조를 구해 수군력 재건에 매진하였다. 그 결과 6개월여 만에 전선 60여 척과 병력 7000여 명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임진왜란 초기 한산대첩에 참전한 정도의 전력인 것이다.

명 수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한 것은 1598년 7월 16일이었다. 명 수군 도독 진린이 이끈 함선 수백 척이 고금도 조선 수군진에 합류하면서 조명 수군 간에 연합작전이 시작되었다. 명 수군이 합류한 지 3일 만에 절이도해전이 벌어졌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명군에게는 관망만 하도록 하고 조선 수군의 힘만으로 적선 1백여 척을 물리쳤다. 명 수군에게 조선 수군의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 당시 작전 통제권이 명군 지휘관에게 있었지만 유사시 조선 수군만의 독자적인 작전도 가능하다는 점을 시위한 것이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명나라 군사들의 조선 백성에 대한 약탈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를 확인한 이순신은 명 수군 도독 진린에게 명군의 범법행위자들에 대한 처벌과 재발방지를 요청했으나 근절되지 않았다. 이순신은 강경하게 대응했다. 조선 수군이 주둔하는 막사를 헐어서 철진(철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에 놀란 진린은 이순신에게 권령권을 넘겨 명군들을 처벌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후 명군 중 조선 백성에 대해 범법행위를 저지른 자는 이순신이 직접 군법대로 처형하였다.

이와 같이 이순신은 조선 수군과 백성들의 자존을 지키는 데 힘썼다. 자신들을 아끼고 위하는 지휘관임을 인식한 장졸과 백성들은 이순신 휘하에서 한마음이 되었다. 심지어 함께 활동한 명나라 군사들마저 이순신을 존경하면서 지휘받기를 원할 정도였다. 그 결과 노량해전에서는 조선 수군과 명 수군이 단합하여 싸운 결과 일본군에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노량해전의 승리 이면에는 이순신의 부하와 백성에게 보여준 자존 리더십이 기여한 바도 있었다. 부하들의 위상을 높여주는 것도 전투력 발휘의 근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순신의 행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 리더십 덕목 - 소통·열정·정의

임진왜란 시기 병조판서를 5번이나 역임하면서 국난 극복에 기여한 바가 큰 백사 이항복(1556-1618)은 당시의 수군상황과 이순신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았던 인물이다. 그는 이순신이 전사한 후 쓴 ‘고통제사이공유사(故統制使李公遺事)’라는 글에서 이순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사람을 접대함에 있어서는 온화하고 소탈하며 곡진(曲盡, 마음과 정성이 지극함)하여 간격이 없었고, 일을 당해서는 과감하게 처리하여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형벌을 주고 상을 주는 데 있어서는 일절 귀세(貴勢)나 친소(親疎)를 가지고 자신의 뜻에 경중(輕重)을 두지 않았다. 그 때문에 뭇 아랫사람들이 공을 두려워하며 사랑하였고, 가는 곳마다 치적(治績)을 올리었다.

위의 언급은 이순신의 리더십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평가된다. 이것을 부연해 보면, 먼저 사람을 접대함에 있어서는 온화하고 소탈하며 곡진(曲盡, 마음과 정성이 지극함)하여 간격이 없었다는 것은 자신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온화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대접함으로써 상호간에 틈이 없이 소통을 이루었다는 것을 말한다.

다음으로 일을 당해서는 과감하게 처리하여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라는 것은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소신과 추진력을 가지고 임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자기 업무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형벌을 주고 상을 주는 데 있어서는 일절 귀세(貴勢)나 친소(親疎)를 가지고 자신의 뜻에 경중(輕重)을 두지 않았다.고 한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곧 용기있는 결단이 요구되는 것으로 정의감이 충만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언급을 통해 이순신 리더십 덕목을 요약한다면 소통, 열정, 정의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이순신을 단지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만 보는데 그친다면 이순신은 단순히 우리 마음속에서 그리움의 대상으로만 머물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을 제대로 배우고 그 교훈을 실천한다면 이순신은 우리 생활 속에 함께 존재하면서 우리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인도할 것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