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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사랑하는 정신

나라는 국가를 의미하며, 국가는 국민과 영토와 주권으로 구성된다.
충무공의 국민과 국토를 사랑하는 정신은 그 어떤 덕목보다 앞서고 있으며 그런 주요 사례를 살펴보자.

(사례1) 1594년 3월 명나라 도사 ‘담종인(譚宗仁)’이 충무공에게 서신을 보내기를 “일본의 여러 장수들이 마음을 돌려 귀화(歸化)하려고 생각하지 않는 자가 없고, 모두들 무기를 거두어 다들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고 하니, 너희들도 여러 병선들을 이끌고 속히 제 고장으로 돌아가고, 일본 진영에 가까이 하여 트집을 일으키지 말라”고 하면서 일본군과 화친하기를 명령하다시피 했다.
그때 충무공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아픈 상태에서도 너무나 분하여 스스로 답장을 지어 보냈다.

왜놈들이 거제·웅천·김해·동래 등지에 둔거하고 있는 바, 이것이 모두 우리의 땅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일본 진영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것은 무슨 말이며, 우리에게 속히 ‘제 고장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제 고장’이란 역시 어느 곳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으며, 혼란을 일으킨 자도 우리가 아니고 왜놈입니다.

라고 강경하게 항의를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 땅”이라고 말한 글이 바로 국토 사랑이며 나라사랑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본고장이란 어느 쪽을 가리키는 것인가”라고 지적한 것은 수군의 진영이 있는 여수나 한산도만이 본 고장이 아니라, 일본군이 머무르고 있는 부산?웅천도 내 고장이요, 내 땅이며, 조선 천지가 모두 우리 땅임을 밝히고 우리 국민과 사랑하는 부하를 없앤 적들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명나라는 대국의 위세를 빙자하여 우리나라와 국민을 깔보는 태도를 자주 보이곤 했다. 그 중 명나라 장수 담종인도 그런 부류였는데, 조선의 장수로서 주인 의식을 보여준 충무공의 의연한 자세에서 한 치의 땅이라도 우리의 국토를 아끼고 지키려는 정신이 얼마나 투철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사례2) 임진왜란 초기, 충주 방어선이 무너지자 선조 임금은 파천을 하여 멀리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유사시 국경을 넘어 명나라 내부에까지 몸을 의탁할 결심을 신료들에게 표명했다. 이러한 때에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충무공은 항상 따로 정미 오백 석을 쌓아 두고 있었다. 이를 궁금히 여긴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면 바로 대답하기를, "만일 왕의 수레가 압록강을 건너는 날이면 나는 마땅히 이 쌀을 싣고 서해로 올라가 왕의 수레를 맞이하여 회복키를 도모하다가, 성공하지 못하면 임금과 신하가 내 국경 안에서 같이 죽을 것"이라 하였다.
그 당시 모든 장수와 재상들은 고생스런 피난길에 임금의 말고삐를 잡고 따라가면서 피난하는 동안 단순히 군주에 대한 충성과 절개를 다하기를 맹세할 뿐이었다. 다시 말해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것으로 자기 책임을 삼으려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충무공만이 홀로 적극적인 구국(救國)의 결의를 다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충무공은 내 땅을 벗어나 다른 나라로 간다는 사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음을 표명하였다. 그것은 한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취할 바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랬기에 충무공은 매 해전시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즉, 항상 배수진을 친 자세로 해전에 임했던 것이다.

(사례3) 1592년에 일본에 의해 조선의 강토가 한 달도 되지 못하는 사이에 유린된 상황에서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게 되었다. 이때 충무공은 이러한 위태로운 사정을 몸을 던져 걱정하는 심정을 그가 지은 시에 잘 나타내었다.

임의 수레 서쪽으로 멀리 가시고 天步西門遠
왕자들은 북쪽에서 위태로운데 君儲北地危
나라를 근심하는 외로운 신하 孤臣憂國日
장사들은 공로를 세울 때로다. 壯士樹勳時
바다에 서약하니 어룡이 감동하고 誓海魚龍動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 盟山草木知
이 원수 왜적을 모조리 무찌른다면 讐夷如盡滅
이 한 몸 죽을지라도 마다하리요. 雖死不爲辭

이 시에서 충무공은 그 당시의 전황에 대하여 비분강개한 심정을 가지고 한 목숨 바쳐 이 강토를 짓밟고 있는 왜적을 모조리 무찌르기를 소원하였던 것이다.

(사례4) 충무공의 우국충정이 담긴 또 한편의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바다에 가을 빛 저물었는데, 水國秋光暮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驚寒雁陣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憂心輾轉夜
새벽달 창에 들어 활과 칼을 비추네. 殘月照弓刀

충무공의 이 시에 대하여 이은상씨는 문학가요 시인의 자격으로 평가하기를, “이 시야말로 충무공이 옛 시를 가져다가 자기 심정을 살리고 자기 심정을 읊어 뒷사람을 울린 것이라 할만하다. 과연 이 시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많은 영웅시 가운데서도 가장 우수한 작품인 동시에 그의 나라를 근심하는 안타까운 시정을 가장 절실하게 표현한 작품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충무공은 항상 한 목숨 바쳐 이 나라와 백성을 구하겠다는 한없는 충정을 가지고 구국의 선두에 섰던 것이다.

(사례5) 다음은 해전을 수행하면서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대목이다.

한창 전투를 하고 난 이튿날에 또다시 돌진하여 그 소굴로 분탕하고 그 배들을 모조리 깨뜨리려고 하였으나, 위로 올라간 적들이 여러 곳에 가득 차 있는데, 만약 그들의 돌아가는 길을 차단한다면, 모두 궁지에 빠진 도적들이 최후 발악을 할 염려가 되므로 하는 수없이 수군과 육군이 함께 진격한다면 바라는 대로 섬멸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말은 1592년 9월 1일에 있었던 부산포해전의 장계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충무공은 삼도수군을 지휘하여 왜적선 470여 척과 싸워 100여 척을 쳐부수었으나, 나머지 왜적을 다 부수지는 못하였다. 그 이유는 왜적들이 육지에서 나오지 않고 싸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부산 성밖에 사는 백성들이 왜적들에게 공격을 받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무공은 공격만이 최선이 아님을 알고는 오히려 왜적이 도망갈 틈을 내어줌으로써 우리 백성을 안전하게 보호하겠다는 봉황의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충무공은 끝까지 공격할 수도 있었겠지만, 수군과 육군이 동시에 공격한다면 우리 백성들의 인명피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겨레사랑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충무공은 임진왜란 초기부터 전황을 직시하면서 나라의 장래에 대하여 걱정을 하였고, 외세에 굴하지 않는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다. 그리고 전투 중에는 백성들을 먼저 사랑하는 마음을 표출하면서 전공보다는 백성들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기도 한 위대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의를 실천하는 정신

정의는 올바른 도리, 바른 행동을 말한다. 이 정의라는 말은 곧 공(公)과 사(私)를 구분한 대의명분(大義名分)이며, 나라의 안위(安危)가 앞서는 진리 속에서의 바른 길임을 뜻한다.
충무공은 일생을 통하여 어떤 역경 속에서도 변함없이 올바른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는 이 정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매우 어려운 처지가 되고 파면·구속되는 등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사례1) 충무공이 과거에 합격했지만 권문세가와 결탁하여 자신의 영달을 꾀하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 율곡 이이 선생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충무공의 이름을 듣고는 같은 종씨임을 알고는 서애 유성룡을 통하여 한번 보기를 청했지만, 충무공은 “나와 율곡이 같은 성씨라 만나 볼만도 하나, 이조 판서로 있는 동안에 만나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고 하면서 끝내 가지 않았다.
또 충무공이 훈련원에 있을 적에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이 자신의 서녀를 충무공에게 첩으로 주려고 하였으나 충무공은 “벼슬길에 갓 나온 내가 어찌 권세 있는 집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을까 보냐”라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매파를 돌려보냈다.
이와 같이 충무공은 공직생활 초기에 있었던 여러 가지 권문세가와의 결탁을 과감히 뿌리침으로써 정의로운 공작자로서의 자세를 견지한 것이다.

(사례2) 충무공이 35세에 훈련원에 봉직할 때 병부랑(병조정랑)으로 있는 자가 자기와 친근한 자를 순서를 뛰어 넘어 참군으로 올리려 하므로 다음의 사례와 같이 충무공은 담당관으로서 허락하지 않았다.

“아래 있는 자를 건너 뛰어 올리면 당연히 승진할 사람이 승진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라 공평하지 못할뿐더러 또 법규도 고칠 수가 없는 것이오.”하였다. 병부랑이 위력으로 강요하였으나 공은 끝내 고집하고 듣지 않으니 병부랑이 크게 성이 났지만 감히 마음대로 올리지 못하였다.

당시 사회는 정의와 불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혼탁한 상황이 비일비재하였다. 이러한 공직사회의 분위기 속에서도 충무공은 홀로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것이다.

(사례3) 충무공은 1580년 7월 발포만호로 근무하였다. 하루는 그의 상관이던 전라좌수사 성박이 사람을 보내어 발포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겠다고 전하였다. 이 때 충무공은

이 땅은 나라 땅이요, 이 땅 위에 있는 이 나무는 나라의 물건입니다. 여러 해 동안 길러 온 것을 하루아침에 벨 수 없으며, 더욱 공용이 아닌 사용으로는 벨 수 없습니다.

라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한마디로 거절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공과 사를 반드시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는 올바른 태도를 의연히 보여준 사례다.

(사례4) 충무공은 1582년 5월에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였다. 이때 정승 유전(柳琠)이 충무공에게 좋은 전통(箭筒)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자기에게 줄 것을 부탁한 일이 있었다. 다음의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충무공은 불의하다고 판단되는 뇌물을 일절 바치지 않았다.

“이 화살 통을 드리기 어렵지 않으나, 남들이 대감이 받는 걸 어떻다 하며 소인이 바치는 것을 어떻다 하오리까. 화살 통 하나로 대감과 소인이 함께 더러운 지탄을 받게 되는 것이 미안합니다.”라고 대답하자, 정승 유전도 “그대 말이 옳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곧 충무공이 윗사람에게 아부하지 않는 청렴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충무공은 이러한 처사로 상관들로부터 못마땅하다고 미움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언제나 정의를 실천하는 정신이 투철하였기 때문에 조그마한 일이라도 옳은 일에 있어서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라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바르게 살았던 것이다.

책임을 완수하는 정신

책임은 끝까지 자신이 수행해야 할 임무를 말한다. 특히 군인에게 있어서의 그것은 목숨을 걸어 놓고 조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즉 상부에서 지시한 사항 또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관 업무를 빈틈없이 끝까지 처리해야 함을 말한다.

(사례 1) 1593년 3월 웅천 앞바다에서 있었던 일인데, 수군을 지휘하여 적선을 무찌르고 돌아오다 군사들이 방심하여 통선 1척이 전복된 적이 있다. 충무공은 곧 다음과 같이 조정에 장계하였다.

제가 중책을 지고 티끌만한 공로나마 나라에 보답하려 하였는데, 통선 1척을 전복하여 많은 사상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는 제가 용병술이 좋지 못하고 지휘를 잘못한 때문이므로 극히 황공하여 거적자리에 엎드려 죄를 기다립니다.

이 말은 지휘관으로서 자신이 직접 저지르지 않았을지라도 부하의 잘못에 대해서는 지휘관인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그런 잘못을 부하의 잘못으로 전가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잘못 때문에 국가의 재산과 인명을 잃었다고 하면서 책임을 통감하고 자신이 벌을 달게 받겠다는 의연한 자세를 보였던 것이다.

(사례2) 초서체 난중일기에 보면, 백의종군하던 중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의 직책을 임명받게 되는 시기를 전후하여 〈독송사(讀宋史 : 송나라 역사를 읽고)〉라는 독후감에서 자신의 소신을 밝힌 바 있다.
그 글은 옛날 중국의 송나라가 금나라의 침입을 받았을 때 송나라 재상 이강(李綱)이 온갖 모략에 못 이겨 재상으로서의 책임을 망각하고 도피해 버리려는 말을 했다는 내용에 대하여 비판한 글이다. 충무공은 그 글 속에 다음과 같은 말을 적었다.

어허, 저 강은 왜 가려고만 하는가, 가면 또 어느 곳으로 가려는가. 신하된 자는 몸을 버려 나라의 은혜를 갚을 때인데, 도피한다는 말은 참으로 마음에 생각도 못할 말이거늘 어찌 입 밖으로 낼 수 있을 것인가

위의 사례는 나라가 어려움에 처한 때 재상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도피하려고 생각만 품고 있었던 것을 크게 꾸짖은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충무공 자신이 그 같은 처지에 놓인다면 어떻게 할 것이라고 한 말이다. 다음의 사례는 이를 입증하고 있다.

나라를 침범하는 적과는 피로써 항쟁할 것을 주장할 것이요,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당연히 죽음을 택할 것이요, 또 그렇게도 할 수 없는 경우라면 화친하는 정책 속에 몸을 던져 구국의 실마리를 열어 볼 것이다. 그것 말고는 신하된 자로써 제 나라를 버리고는 갈 곳이 없다.

다시 말해서 그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책임 있는 자 또는 중책을 맡고 있는 자는 제 몸을 보호하기 위해 도피하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기 속에 분명히 밝혔던 것이다.
이러한 충무공의 책임완수 정신은 해전을 수행할 때에도 나타나는데, 1598년 11월 19일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싸움이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군사들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

라는 유언을 남김으로써 끝까지 자기의 책임을 다하였던 것이다. 실로 충무공이 보여준 책임완수 정신은 마지막 운명하는 순간까지 소임 완수를 위해 맡은 일을 스스로 찾아서 적극적인 자세로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례 3) 1594년 8월 30일 난중일기에는 “부인의 병이 몹시 위독하다는 편지가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 충무공은 나라일과 자기 집안의 일 가운데서 어느 것이 우선 인지를 명쾌하게 밝혀두고 있다.

그러나 나라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은 생각이 미칠 수 없다.

이것은 곧 가족걱정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랏일이 더 우선되었음을 나타낸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충무공도 보통사람이었기에 아내의 병세를 걱정하고 있었음이 그 이튿날 9월 1일의 일기에 적혀 있다.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촛불을 켠 채 뒤척이며 지냈다. 이른 아침에 세수하고 조용히 앉아 아내의 병세가 어떤지 점을 쳐봤다.

이것은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애타는 심정을 달리 나타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일기에만 표출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불편한 심정을 남 앞에 드러 내놓고 내색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오로지 나라를 위한 군무(軍務)에 전념(專念)함으로써 여념(餘念)이 없었던 것이라 여겨진다.
가족과 나라는 끊을 수 없는 관계이다. 그 가운데서 경중을 따질 때, 나라를 먼저 걱정을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소 집단적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그의 행적이라 할 것이다.

창의로 개척하는 정신

창의로 개척한다는 것은 새로운 분야에 처음으로 손을 대거나 막힌 진로를 트는 것을 말한다. 충무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이나, 전쟁 중에도 지속적인 전비태세 유지를 위하여 실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나가는 면모를 보였다.
우리는 흔히 주어진 환경 속에서 순응하며 살고 있지만, 사람이란 주어진 환경이라 하여 산다는 그 자체에 만족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항상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서 살려고 한다. 여기서 창의란 말은 보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새로운 환경을 만들려는 생각을 말하며, 개척은 그러한 의견을 새로운 방법과 발전적 태도로써 대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것들-당시 논밭을 개간하는 것이나, 무기 등 모든 것을 보다 편리하게, 보다 좋게 만들려는 노력 등을 보이는 자세들이 곧 창조하는 정신이자 개척하는 정신인 것이다.
나라에 있어서도 그 국민이 창의와 개척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한 민족은 부흥과 약진이 거듭 되었고, 그렇지 않은 민족은 국운이 기울어 급기야는 몰락의 과정을 밟게 되었는데, 이러한 예는 인류역사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일이다.
충무공은 실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였다. 이것은 영국의 발라드(G.A. Ballard)가 “이순신 제독이 넬슨보다 나은 점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계발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고 한 것을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이 기계발명의 ‘기계’는 곧 거북선을 일컫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례1)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2월에 충무공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였을 때는 나라 전체적으로 국방 태세가 매우 허술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충무공은 작은 일에서부터 큰일에 이르기까지 새 의견과 새 방법을 찾아서 군사들의 훈련을 비롯하여 무기를 정비하는 등 온갖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현재 여수 진남관 앞에 보존되어 있는 석인(石人)만 보더라도 전선이나 배를 매어 두는 돌마저 옛 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일본군의 침범을 예견하여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것은 매우 미래 지향적이고 선견지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저는 일찍이 왜적들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적선이 수백 척이라도 쉽게 돌입하여 포를 쏘게 되어 있으므로, 이번 출전 때 돌격장이 그것을 타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1592년 6월 14일에 보고한 〈당포파왜병장〉에 나오는 것인데, 거북선이 건조된 후 2차 출전 때에 처음으로 운용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틀 전에 베돛을 만들었고, 하루 전인 4월 11일에는 대포(지자, 현자총통)를 발사 시험했다고 한 사실을 통해 볼 때 충무공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후 창의력을 발휘하여 건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모든 것이 허술한 상태에서 아무런 의욕도 구상도 없이 무사안일만을 바라던 그 때에 거북선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흔히 보는 전선과는 다른 점이 많을 뿐 아니라, 수많은 자재와 인력이 동원되었기 때문에 비웃음과 의혹과 방해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충무공은 이런 모든 것을 이겨내고 거북선을 만들었으니 그 정신이 바로 “창의로 개척하는 정신”인 것이다.

(사례 2) 충무공은 한산도 진영에 있는 동안 그간 수차례의 해전에서 얻은 문제점을 시정하여 발전시켰다. 심지어 일본군의 조총을 보고서는 적군의 무기지만 그 장점을 파악하여 조선수군의 무기제작에 반영하였는데, 충무공은 무쇠를 백방으로 수집하여 조총보다 위력이 강한 정철총통을 만들고야 말았다.
새로운 무기를 보고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다음의 장계는 이러한 의지가 표출된 하나의 사례라 할 것이다.

우리의 승자총통이나 쌍혈 총통은 총신이 짧고 총구멍이 얕아서 왜적의 조총만 같지 못하며 그 소리도 웅장하지 못하므로 정철을 두들겨 만들었는데 총신도 잘되고 총알이 나가는 힘이 조총과 똑같습니다. 정철로 만든 조총 다섯 자루를 올려 보내오니 조정에서 각 도의 여러 고을에 명하여 모두 제작토록 하여 서로 다투어 만들게 함이 좋겠습니다.

이 내용은 요즘의 포술전문가의 분석에 못지않은 뛰어난 분석능력이다. 그리고 수군뿐만 아니라 육군들도 이러한 총통을 제작하여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을 볼 때 자신의 공적을 앞세우거나 수군만이 제작하여 공훈을 세워 보자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무찌르는 데 함께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충무공의 한산도 생활에 대한 기록을 보면, 수군을 모집하는 일부터 군량 및 군복, 전선, 총통을 제작하는 데 충무공 자신이 스스로 해결해 나가야만 했던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군수물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둔전을 경작하여 군량을 모으고 소금을 굽고, 고기를 잡아 그것을 팔기도 하고 군복을 지어 입히는 등 모든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여 어려움을 해결하였으니, 이는 충무공의 창의로 개척하는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례 3) 1598년 2월, 충무공은 고하도에서 고금도로 통제영을 이진한 후 수군 재건사업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 때 해로통행첩(海路通行帖)제도, 즉 오늘날의 선박 운행증과 같은 새 제도를 시행하였다. 큰 배는 벼 3섬, 중간 배는 2섬, 작은 배는 1섬씩을 바치고 증명서를 보유해야만 바다를 통행할 수 있게 한 것인데, 이제도를 시행 후 10여 일만에 1만 섬의 군량을 모았다고 하였다.
이는 충무공이 고하도와 고금도에서 수군 진영을 운영하고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자확보를 위해 실시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전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충무공이 주변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여 ‘무에서 유를 창조 한다’는 자세로 매진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충무공의 이러한 정신은 결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또 여러 여건이 구비된 상황에서 찾은 것도 아니었다. 충무공은 악조건 속에서 일어설 수 있는 새 길을 스스로 찾아내었던 것이다. 실로 충무공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창의로 개척하는 정신’은 나라를 위해 지혜와 용기, 그리고 신념을 가지고 새 것을 찾아내는 자세를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희생을 감내하는 정신

희생이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몸을 바쳐 모든 것을 돌보지 않는 고상한 덕목이며 감내란 희생과 관련하여 모든 고통을 참고 견딘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느 나라 어떤 조직체를 막론하고 전체적인 단결과 화합에 의한 발전을 이룩하려면 보다 큰 가치를 획득하려고 작은 가치를 지불하게 마련인데 이것이 바로 희생이란 단어로 표현되는 것이다.

(사례 1) 여러 해전 가운데서도 특히 1597년 9월 16일에 있었던 유명한 명량해전은 10배 이상의 적선을 향해 진두에서 독전하며 승리를 하였던 것인데, 그러한 승리의 요인 중에는 충무공이 명량해전 직전에 부하 장병들에게 이른 말이 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千)명의 적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라고 하였으며, 또

적이 비록 천(千)척이라도 감히 우리에게 덤벼들지 못할 것이다. 조금도 마음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

라고 독려한 내용에서 충무공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치겠다는 구국의 희생정신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 중 육상에서는 전투하는 곳마다 많은 피해를 입었던 반면, 바다에서는 충무공이 지휘하는 수군이 연전연승을 거두게 된 것도 그를 비롯한 조선 수군들이 희생을 감내하는 정신으로 전투에 임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