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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발발과 극복

임진왜란은 우리민족 역사상 가장 처참했던 전쟁이었고, 그 피해 또한 다른 전쟁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이 전쟁이 주는 교훈을 우리는 깊이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유 외에도 우리가 임진왜란사를 살펴보는 까닭은 이 전쟁에서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 전쟁 승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 때문이다. 즉 이순신의 활동을 정확하게 살펴보기 위하여 그의 주 활동무대였던 임진왜란사를 먼저 개관(槪觀)하는 것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란?

1592년(임진년) 4월 13일에 일본의 조선침략으로부터 시작되어 조선 일본 명의 3국이 1598년 11월 24일까지 6년 7개월 간 조선 땅에서 벌인 국제전쟁으로 흔히 7년 전쟁으로 불린다. ‘임진왜란’의 용어는 한국 일본 중국이 다양하게 호칭한다.

- 한국 : 일본의 1차 침략을 임진왜란, 2차 침략을 정유재란, 합쳐서 ‘임진정유왜란’ 또는 대표적으로 ‘임진왜란’이라고 부르며, 최근에는 ‘조일전쟁’으로 호칭하기도 한다.

- 일본 : 1592년부터의 1차 침략을 분로쿠의 역(文祿の役), 1597년부터의 2차침략을 게이초의 역(慶長の役), 합쳐서 ‘분로쿠게이초의 역’이라고 부르며, 이외에 히데요시의 대륙진입(秀吉の唐入り), 고려진(高麗陣), 조선진(朝鮮陣), 조선정벌(朝鮮征伐), 삼한정벌(三韓征伐), 정한역·조선역·조선출병 등으로 칭한다.

- 중국 : 만력조선역(萬曆朝鮮役) 혹은 임진왜화(壬辰倭禍)로 호칭한다.

임진왜란의 배경

14세기 이후 약 200년 동안 안정을 유지하던 동아시아는 16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조선의 인접국가인 중국 여진 일본 모두 자체적인 변동과 혼란을 수반하는 가운데 대전란의 조짐이 배태되고 있었다. 14세기 동아시아의 정세는 대륙의 영향력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파급되는 것이 일반적인 양상이었다. 그러나 16세기는 도리어 일본의 영향력이 한반도를 거쳐 명나라에 미치는 흐름으로 반전되고 있었다. 임진왜란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여기에 만주에 자리잡은 여진족이 급속하게 성장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정세는 더욱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 명나라의 쇠퇴

15세기 명나라의 정치적인 상황은 황제가 절대적인 권력을 추구하면서도 황제와 사적인 관계에 있는 유력한 인물 또는 집단이 황제권을 대행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양상은 16세기까지 그대로 답습되어 왕의 측근 또는 환관이 권력의 주체로 부상하기에 이른다. 정덕제(正德帝 : 1505~21), 가정제(嘉靖帝 : 1522~66)는 ‘환관정치’를 조장한 대표적인 황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환관은 중앙권력을 잠식하는 암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융경제(隆慶帝 : 1567~72)와 그의 아들 만력제(萬曆帝 : 1572~1620)의 초기 10년은 수석대학사 장거정(張居正)이 정치적인 실권을 행사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한동안 환관정치를 저지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장거정의 전권에 대한 반발로 생긴 동림당(東林黨)과 환관의 대립은 후일 명나라 멸망의 근원이 되었다.

한편 16세기는 달단(韃靼)과의 대립이 격화된 시기였다. 특히 가정제의 치세는 달단의 약탈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로서 1550년에는 수도 북경이 수일간 포위된 일도 있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동남해안에는 이른바 ‘북로남왜(北虜南倭)’의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명나라는 1546년 급기야 해금령을 단행하여 왜구의 약탈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제어력을 상실한 미봉책에 불과하였다.

북로남왜에 따른 재정 궁핍은 장거정의 개혁정치에 의해 어느 정도 회복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몽고의 항장 보바이의 반란을 필두로 하여 만력제의 재위기간 중반 이후에는 각종 반란 사건이 속출하게 되었다. 이는 한마디로 총체적인 위기를 의미했다. 설상가상으로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조선에 원병을 파견하는 상황에 이르자 명나라의 국력은 극도로 약화되었다.

2) 여진족의 성장

1424년 만주경략에 눈부신 성과를 올린 영락제(1403~24)가 사망하자 만주에 대한 명의 지배력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명나라 세력의 약화는 곧바로 여진족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이에 16세기 후반에는 후일 여진족을 통합하여 후금(청)을 건국하는 누르하치가 만주의 실력자로 부상하게 된다.

그는 본래 건주우위(建州右衛)의 장군으로서 소자강 유역에서 활동하던 탑주라는 인물의 아들이었다. 누르하치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583년(선조16)이후였다. 그는 명에 대해서는 공손한 태도를 취하는 가운데 주위의 여러 부족들을 차례차례 합병하며 강력한 세력을 구축해 나갔다. 이런 선상에서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에는 해서여진과 몽고의 연합군을 혼하 일대에서 대파함으로써 제국건설의 발판을 다졌다. 이때 그는 때마침 의주로 피난 온 선조에게 사신을 보내 파병의 의향을 보이는 등 여유를 과시하기도 했다.

명나라의 쇠퇴와 여진족의 흥기는 시대적인 대세처럼 보였다. 이후 만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누르하치는 1616년 후금을 건국한 다음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게 된다.

3) 일본의 통일과 조선출병

16세기의 일본은 한마디로 ‘전국시대’였다. 무로마치(室町)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자 각지의 호족들이 상호 치열한 투쟁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6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의 주도하에 서서히 통일정권을 이룩하려는 조짐이 일었다. 이러한 격동의 결과는 낡은 권위의 청산과 새로운 세력의 부상이었다.

한편 이시기를 전후하여 일본은 유럽인과의 접촉을 통해 각종의 서양문물을 흡수하고 있었다. 특히 포르투갈을 통해 총이 유입되어 무력이 증강됨으로써 전술상에 커다란 변화가 초래되었다. 오다노부나가는 이 신식무기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통일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로 일본정치의 중심지인 쿄오토를 수중에 넣음으로써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되었다. 이런 선상에서 오다노부나가는 1560년 반대파를 물리친 다음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포섭하는데 성공하여 통일사업을 한층 더 앞당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1582년 암살당함으로써 통일 사업을 완수하지는 못했다.

오다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통일사업을 종료한 인물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였다. 그는 오다노부나가의 후계자라는 지위와 자신의 역량을 바탕으로 통일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오사카는 통일사업의 새로운 거점으로 대두되었다. 이후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평화를 맺은 다음 1587년 구주정벌을 완료함으로써 사실상의 통일사업을 완수하기에 이른다. 바로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출병(朝鮮出兵)’이라는 무시무시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1591년부터는 출병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대전란을 예고했다. 1592년 4월의 임진왜란은 바로 그 결과였다.

임진왜란의 경과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침략하여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북상을 계속했다. 왜군의 분탕 속에 연로의 백성들은 생목숨을 강요당했고 강산은 피로 물들어갔다. 그리고 무수한 문화재가 파괴되었다.

선조는 백성들의 원망과 호곡을 외면한 채 서울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분노한 백성들은 경복궁에 불을 지르고 노비문서를 소각했다. 왕과 조정에 대한 불만은 민심의 이반으로 표출되었다. 외침보다 무서운 내분이었다.

1592년은 왕조 건국 20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다. 경축하고 기념해야 할 그 해에 가장 참혹한 병란을 당한 것이다. 그것도 미개한 야만국가로 멸시하던 일본에게 덜미를 잡힌 것이다. 표면적인 평화는 지배층의 문약을 조장하는 한편 현실감각을 무디게 했다. 사화와 당쟁으로 인한 정치적인 혼란이 심화되면서 국방체계는 더욱 약화되어 갔다. 더욱이 1575년(선조8) 사림이 동인 서인으로 분열함으로써 내부적 단결은 더욱 어려워졌다. 남으로는 왜, 북으로는 호족과 대치하는 이른바 남왜북호(南倭北胡)의 상황에서 일각으로부터 국방강화책이 제시되었으나 현실성 없는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전란의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어갔다.

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과 통신사의 파견

16세기 후반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한 야심가가 출현하여 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일본 열도를 통일했다. 이에 ‘태양의 아들’을 자처한 도요토미는 점차 과대망상에 빠져들고 있었다. “나의 이름을 동양3국에 떨치는 것이 소원이다”는 연설을 주저없이 내뱉었다. 이러한 도요토미의 성향은 곧바로 대륙출병의 야욕으로 표출되었다. 공명심과 정복욕에 더하여 도요토미를 자극한 것은 제후들에게 분배할 영지의 필요성이었다. 이는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킴으로써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강화하는 한편 신흥세력의 성장을 억제할 필요가 있었던 도요토미의 본심과도 부합되는 일이었다.

1586년 구주지방까지 제패한 도요토미는 더욱 기고만장하여 주변국가의 국왕들에게 입조를 독촉했다. 여기에는 명나라와 조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력을 앞세운 도요토미의 오만 앞에 국제질서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589년 11월 조선에서는 통신사의 파견을 결정했다. 일본의 상황과 도요토미의 본심을 탐지하기 위해서였다. 정사는 서인 황윤길, 부사는 동인 김성일, 서장관은 동인 허성이었다.

1590년 6월 대마도에 도착한 통신사 일행은 대마도주가 말을 탄 채로 조선의 사신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 이미 전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당시 대마도는 조선국왕의 도서를 받는 경제적인 속방이었기 때문이다.

7월경 일본의 수도 교오토에 도착한 통신사 일행은 무려 4개월을 기다렸다. 동북 지방의 경략에 나섰던 도요토미가 돌아온 것은 그해 11월이었다. 이때 도요토미는 통신사 일행을 자신의 일본 통일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복속 사절로 오인하고 있었다. 통신사의 눈에 비친 도요토미는 한 마디로 무례한 권력가였다. 그는 통신사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본심을 감추는 데 부심했다. 국빈을 영접하는 엄숙한 자리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온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침략의 야욕을 은폐하기 위해서는 예의와 위엄을 상실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도요토미의 이 모든 위장술에도 불구하고 통신사 일행은 그의 침략의도를 나름대로 간파하고 돌아왔다.

1591년 3월에 귀국한 통신사는 곧바로 사행결과를 보고했다. 이 자리에서 정사 황윤길이 침략의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자 부사 김성일은 그것을 부정했다. 서장관 허성과 김성링의 수행원 황진이 황윤길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김성일은 완강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반된 보고로 조정에는 혼선이 빚어졌다. 요행을 바라던 조정은 반신반의하는 가운데 김성일의 보고를 채택했다. 김성일이 소속되어 있던 동인이 집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나마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여 추진되고 있던 축성사업과 제반 방비책을 중지시켰다.

사실 조선은 김성일의 보고내용과 무관하게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도요토미의 망발이 여러 경로를 통해 조선쪽에 전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김성일이 황윤길의 주장을 일축한 것은 민심의 동요를 우련한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즈음 도요토미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구호로서 조선을 더욱 압박했다. 입공을 거절한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선에 길을 내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일각으로부터 “조선이 나서서 명나라에 알선하여 일본의 공로(貢路)를 열어주면 무사할 것이다”는 조언이 있었지만 조선은 이를 무시했다. 바로 이 무렵 왜관(倭館)의 일인들이 일제히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그것은 곧 전쟁을 알리는 적신호였다.

2) 왜군의 침입과 북상

나고야에 20만 대군을 집결시킨 도요토미는 1592년 4월 13일 오전 8시에 출정을 명령했다. 고니시(小西行長)가 거느린 제1번대가 부산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였다. 임진왜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불시에 침입을 받은 부산진첨사 정발은 목숨을 걸고 항전했지만 왜군의 예봉을 막지 못하고 전사했다. 임진왜란 최초의 패전이었다. 부산을 함락한 왜군의 다음 공격 목표는 동래부였다. 동래부사 송상현 역시 관민과 합세하여 왜군에 맞서 고군분투했다. 참으로 치열한 전투였다. 그러나 그 역시 왜군을 방어하지 못하고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왜군의 북상로는 크케 중로-좌로-우로의 3로(三路)로 구분된다. 중로는 동래-양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조령-충주-여강-양근-용진나루를 거쳐 서울에 이르는 경로로서 주장은 고니시였다. 좌로는 동래-장기-기장-울산-경주-영천-신녕-의흥-군위-용궁-문경-조령-충주-죽산-용인을 거쳐 한강에 이르는 경로로서 주장은 가토(加藤淸正)였다. 우로는 동래-김해-성주-무계-지례-금산-추풍령-영동-청주를 거쳐 경기도에 이르는 경로로서 주장은 구로다(黑田長政)였다. 이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공격로는 고니시의 1번대가 주축이 된 중로였다.

왜군의 침략을 보고받은 조정은 경악하는 가운데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좌의정 유성룡을 총사령관인 도체찰사에 임명하는 한편 신립을 도순변사에 임명하였다. 그밖에 이일·성응길·조경·유극량·변기·변응성 등을 야전 지휘관에 임명하여 전장에 투입시켰다. 이는 근본적인 대책이 전무한 상황에서 취해진 임시변통적인 조처에 지나지 않았다.

200년 평화의 후유증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전쟁이 무엇인지 군인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따라서 장수는 홀몸으로 전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한심하기는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수령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근무지를 이탈했다. 이런 상황에서 군병이 모여들 리 없었고, 가까스로 소집한 병사들도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순변사 이일의 상주전투 패전에 이어 도순변사 신립이 탄금대에서 패전함으로써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려는 노력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신립은 비장한 심정으로 배수의 진을 치고 일대 결전을 벌였지만 끝내 달래강의 혼이 되고 말았다. 선조와 조정 신료들은 신립을 철석 같이 믿었다. 그가 반드시 왜군의 북상을 저지할 것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 마련이었다.

4월 29일 신립의 패보를 접한 선조는 피난을 결심했다. 이산해·김귀영 등의 ‘도성사수론’이 한동안 선조의 발목을 잡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대간이 반대하고 종실이 애원했지만 선조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더욱이 유생들의 궐기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그날로 피난을 강행했다. 이에 선조는 유도대장 이양원과 도원수 김명원을 남겨둔 채 세자와 조신들을 거느리고 몽진길에 올랐다. 근왕병을 모집하기 위해 임해군과 순화군이 함경도와 강원도로 파견된 것도 이때였다. 임금이 도성을 버리는 순간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원망과 분노가 교차하고 있었다. 백성의 분노는 경복궁·창경궁·창덕궁의 방화와 형조·장례원에 보관 중이던 노비문서의 소각으로 표출되었다.

3) 광해군의 세자책봉과 분조활동

신립의 패전과 선조의 피난으로 이어지는 극도의 불안 속에서 비상타개책으로 제시된 것이 광해군의 세자책봉과 분조 활동이었다. 당시 서울은 민심이 극도로 흉흉한 가운데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이다”는 요언이 난무했다. 이에 우승지 신집이 민심을 진정하는 방도로서 세자책봉을 건의하기에 이른다. 평소 광해군을 신임하고 있던 선조는 영의정 이산해·좌의정 유성룡등의 대신을 소집하여 그를 세자에 책봉했다. 신립의 패보가 전해지던 4월 29일의 일이었다.

4월 30일 서울을 떠난 선조의 통치권은 사실상 마비되었다. 왕궁은 불타고 관리와 선비들은 죄다 도망하였다. 심지어 도성 사수를 주장한 인사 중에 단 한 사람도 서울을 지키다 전사한 사람이 없었다.

선조는 한양·개성에 이어 평양이 함락되고 함경도까지 왜군이 침략하자 요동으로 망명할 채비를 갖추었다. 이에 의주로 향하기 직전 평안도 박천에서 세자 광해군으로 하여금 종묘와 사직을 받들고 본국에 머물도록 했다. 이때 조정을 양분하여 선조의 행재소를 원조정,세자가 있는 곳을 소조정, 즉 분조라 했다.

광해군의 분조는 공식적으로 1592년 6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약16개월 동안 활동하였다. 분조에 배속된 관리는 영의정 최흥원 이하 이덕형·이항복·한준·정창연·김우옹·심충겸·황신·유몽인·이정구 등 학식과 외교에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다.

광해군의 본질적인 임무는 분조를 통솔하여 국사를 권섭(權攝)하는 한편 실지수복과 국가부흥을 위해 군국기무를 수행하는 일이었다. 이외 종묘·사직을 주관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임무 중의 하나였다. 광해군에게 관리에 대한 인사권과 포폄권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급선무는 민심을 수습하고 군민을 격려하는 일이었다. 이에 광해군은 평안도·황해도·강원도 등지를 돌며 민관군을 위로하는 가운데 의병활동을 독려하였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분조에 소속된 관리들의 보필을 받아 학문과 경륜을 쌓을수 있었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은 “조선의 부흥은 세자에게 달려 있다”고 말할 정도로 광해군을 높이 평가했다.

1593년 1월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도 광해군과 이여송의 신뢰에 기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년 4월 위험을 무릅쓰고 호남지방에 이르러 민심을 수습하고 군민을 격려한 사실에서도 국란타개에 쏟은 광해군의 노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광해군은 한동안 선조를 대신하여 전시 상황을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평양성의 탈환은 뚜렷한 업적 가운데 하나였다. 광해군은 1593년 분조가 해체된 뒤에도 무군사로 활동하며 국란 극복의 선봉에 섰다.

4) 수군의 활약과 의병의 봉기

5월 2일 서울을 함락시킨 왜군은 북상을 계속하여 6월에는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관군은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이제 전국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한 왜군들은 각처에서 분탕질을 자행했다.
바로 이때 조선 수군의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조선 수군이 이순신수사의 지휘 하에 일본군의 해상 서진을 차단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임진년에 있었던 16차례의 해전 승리는 북상했던 일본군의 발을 묶고 일본군의 남하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조선의 운명에 나름의 희망을 수군이 보여준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별도의 장을 마련하여 살펴보므로 구체적인 언급은 생략한다.

한편 이 시기 조선 8도에서 의병이 봉기하기 시작했다. 관군의 무능은 의병 봉기의 기폭제가 되었다. 여기에 일본에 대한 전통적인 우월감, 향토의식, 유교적인 근왕정신이 발동하여 의병활동으로 분출되었다. 의병은 양반에서 천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의병장의 경우는 양반유생과 전직관료가 단연 압도적이었다. 의병의 총수는 2만2,600여 명으로 추산되는데, 이 수치는 관군의 25%에 해당한다.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곽재우-고경명-조헌-김천일-김면-정인홍-정문부-이정암-우성진-권응수-정세아- 정대임-변사정-양산숙-최경회-김덕령-유팽로-유종개-이대기-홍계남-손인갑-조종도-곽준-임계영-고종후-박춘무-김해-최문병을 들 수 있다.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곳은 경상우도였다. 이곳은 바로 의를 중시한 조식의 학문적인 본거지이며 남명학파의 발상지였다.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곽재우·정인홍·조종도·곽준·이로 등은 모두 이 지역 출신의 의병장들이다. 특히 곽재우는 왜군의 호남 진출을 차단하는 데 혁혁한 공이 있었다. 조식의 수제자인 정인홍은 의병활동이 기반이 되어 정치적인 거물로 성장한 경우였다. 권응수·정세아·정대임은 영천성을 수복하는 데 기여하였고, 김해는 안동·예안을 중심으로 경상도 북부 지역의 의병을 주도하였다.
고경명·김천일은 호남을 대표하는 의병장이었다. 고경명과 고종후는 부자 모두 순국하는 절의를 보였다.
충청도 의병의 대표적인 존재는 역시 조헌이었다. 그는 일찍이 죽음을 각오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정통 유학자였다. 옥천에서 거병한 조헌은 청주성을 탈환한 다음 금산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다 7백의사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의병의 전술은 기본적으로 적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게릴라 전술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지리에 익숙했기 때문에 상당한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당초 조정에서는 의병을 사병으로 간주하여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점차 관직과 특전을 부여하여 사기를 고양시켰다. 의병은 이른바 오합지졸이 대부분이었고, 향토 방어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면이 있었다. 심지어 사이비 의병이 등장하여 의병의 이미지를 변질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병은 전란의 와중에서 근왕정신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호남의 곡창지대를 방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한편 승병도 의병활동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승병의 추축을 이룬 것은 휴정(休靜 : 서산대사)의 문도 들이었다. 승려라고 해서 국난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영규·처영·유정·의엄은 대표적인 승병장들로서 왜군의 격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5) 조명연합군의 반격과 화의론(和議論)의 대두

육지에서는 의병이 봉기하고, 남해안에서는 이순신이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전세는 서서히 역전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명나라의 원병이 참전함으로써 반전의 기미는 더욱 분명해졌다. 물론 조승훈의 1차 원군은 평양 전투에서 패전했지만 명나라의 개입 자체가 왜군에게는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592년 12월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4만 3천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바로 2차 원군이 도착한 것이다.

전열을 정비한 이여송은 1593년 1월 8일 순변사 이일·휴정이 지휘하는 승병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공격했다. 연합군의 맹공을 견디지 못한 왜군은 성안에 불을 지르고 도주하였다. 혈전의 결과로 평양성을 탈환한 것이다. 이는 실로 반전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여송은 왜군을 지나치게 경시한 나머지 추격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1월 26일 서울 북쪽 40리 지점인 벽제관에서 왜군에게 기습을 당하고 말았다. 이에 기세가 꺾인 이여송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개성으로 회군했다. 조선 측에서 누차에 걸쳐 공격을 종용하였지만 응하지 않고 평양으로 돌아갔다.

왜군은 평양에서의 패전으로 인해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으나 벽제관전투의 승리로 다소나마 기세를 회복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전라감사 권율이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행주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왜군은 2월 11일 행주산성을 포위하여 맹공을 감행했다. 그러나 행주산성에서의 응집력은 대단했다. 민관군은 권율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총력전을 펼치며 결사 항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대승을 거두었다. 전사에 빛나는 행주대첩이 바로 이것이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보다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이 화의론, 즉 강화협상이었다. 당초 화의론은 왜장 고니시에 의해 두 차례 제기된 바 있었고, 명나라의 1차 원군을 계기로 다시 한번 거론되었다.

마침 조승훈이 패전하자 명나라에서도 화의에 긍정적으로 임했다. 이에 명나라 대표 심유경이 평양에 와서 고니시와 강화조건을 논의하기까지 했다. 이런 가운데 명나라에서 2차 원병을 보냄으로써 외형적으로는 화의가 결렬된 셈이었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심유경을 통해 협상은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왜군의 입장에서도 의병의 봉기와 명군의 개입으로 인해 전세가 점차 악화됨으로써 화의가 불가피한 실정이었다.

이에 심유경은 화의를 성립시키기 위해 도요토미의 본영에까지 들어가는 노력을 경주했다. 시간적으로도 무려 2~3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그동안 왜군은 서생포에서 웅천에 이르는 사이에 성을 쌓고 화의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는 곧 휴전을 의미했다.

이런 가운데 도요토미는 명나라에 대해 아래와 같은 조건을 요구했다.
첫째,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삼을 것.
둘째, 무역증인을 복구할 것.
셋째,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할양할 것.
넷째, 조선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도저히 수락될 수 없는 요구조건이었다. 이에 심유경은 도요토미를 왕에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이른바 봉공안(封貢案)을 내세워 명나라 조정의 허락을 얻었다. 그러나 이는 허위보고를 통해 조작된 것이었다.

1596년 명나라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하는 책서와 금인을 전달했다. 이에 분노한 도요토미는 사신을 돌려보낸 다음 조선에 대한 재침을 도모하게 되었다. 허위보고라는 비상수단을 동원하면서까지 화의의 성립에 노력한 심유경은 국가기만죄에 걸려 처단되고 말았다.

6) 정유재란

화의의 결렬은 곧바로 전란의 풍파로 이어졌다. 1597년(선조 30) 정월 도요토미는 14만 대군에게 출정을 명령했다. 정유재란이 발발한 것이다. 이때는 조선 수군의 지주 이순신이 무고로 파직되고 원균이 그 후임으로 부임한 상황이었다. 왜군들은 동래·울산 등지를 점거하여 교두보를 확보한 다음 남해안 일대를 왕래하며 전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명나라에서는 형개(邢玠)-양호(楊鎬)-마귀(麻貴)를 핵으로 하는 원병을 파견하여 일본의 재침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조선 측에서도 도원수 권율을 중심으로 임전태세를 강화했다. 8도에 관리를 파견하여 모병을 독려하는 가운데 경주·조령·의령·남원 등 각 요충지에 장수를 파견하여 수비를 한층 강화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그해 7월 통제사 원균이 이끄는 수군이 거제 칠천량전투에서 참패함으로써 이순신에 의해 마련된 수군의 기반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거제 칠천량에서 승리한 왜군들은 이를 계기로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 육군은 호남·호서를 석권하고, 수군은 호남 해안을 점령한다는 두 가지 전략을 세웠다. 이에 7월부터 왜군의 움직임은 본격화되어 사천-하동-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향했다. 조명연합군의 총력전에도 불구하고 8월 중순 경 남원성은 함락되었다. 남원에서의 패배는 곧바로 전주성의 함락으로 이어졌다. 한마디로 파죽지세였다. 임진왜란 초기의 상황과 유사한 양상이 재연된 것이다.

이에 선조의 피난설이 다시 거론되는 가운데 서울의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졌다. 그러나 전열을 정비한 명군·조선군이 북상의 저지에 만전을 기함으로써 전황은 호전되어갔다. 그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이 바로 그해 9월의 소사평전투였다. 명나라 장수 양호가 직산 근방의 소사평에서 구로다군을 대파함으로써 왜군의 북상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것이다.

변화는 해상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에 등용됨으로써 전세는 일순간에 반전되었다. 9월 16일 이순신은 그 유명한 명랑대첩을 통해 왜군의 서진을 완전히 봉쇄한 것이다. 양호가 소사평에서 대승한 지 열흘 만의 일이었다.

소사평전투와 명량대첩에서 일대 타격을 받은 왜군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겨울까지 닥쳐와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왜군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남해안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남해안 800리에 성을 쌓고 주둔함으로써 전쟁은 한동안 소강상태를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명나라의 원군은 계속 조선에 도착하고 있었고, 조선은 조선대로 수륙 양면에서 전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이순신 사이에 알력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이순신이 용의주도하게 대응한 결과 연합수군의 총지휘권을 사실상 이양받기에 이른다.

1598년 7월 양호의 자리를 만세덕(萬世德)이 대신하면서 조명연합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10개월의 공백을 깨뜨린 일대 공세였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전과는 미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전쟁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변수가 작용했다. 그것은 바로 도요토미의 사망이었다. 회군을 명령한 도요토미의 유언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한동안 조명연합군은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한 가지 분명한 현상은 왜군의 신속한 철수였다. 이에 조명연합군도 기민하게 반응하여 왜군의 신속한 철수였다. 이에 조명연합군도 기민하게 반응하여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데 전력했다. 육상에서는 유정의 추격전이 실시되고, 해상에서는 이순신과 진린이 퇴로를 봉쇄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정이 왜군의 뇌물공세에 매수됨으로써 왜군을 소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퇴로를 개척하기 위한 왜군의 뇌물공세는 집요했다. 유정에 이어 이번에는 진린이 포섭의 대상자가 되었으나 이순신의 저지로 뇌물작전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제 왜군은 독안에 든 쥐와도 같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왜장 고니시는 시마즈(島津義弘)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것이 고니시가 취할 수 있는 마지막 방안이었다.

1598년 11월 18일 밤 시미즈는 군함 500여 척을 이끌고 노량을 기습했다. 그 유명한 노량해전(露粱海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1월 19일 새벽 2시경부터 시작된 이 해전에서 통제사 이순신은 결사항전의 비장한 각오를 되새기며 전쟁에 임했다.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격렬한 싸움이었다. 이순신은 장병들과 함께 분전하여 수많은 적의 군함을 격침시켰으나 아침 동이 틀 무렵 유탄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일본군의 완전한 패전이었다. 시마즈는 겨우 50여 척의 군함을 이끌고 도망했을 뿐이었다. 임진왜란은 이렇게 종결되었다.

7) 전쟁이 남긴 것은?

왜란의 끝은 상처와 고통 뿐이었다. 수많은 백성들이 생목숨을 잃었고, 농경지의 대부분이 황폐화되었다. 그리고 귀중한 문화재가 파손되거나 약탈당했다. 납속책의 시행으로 인해 신분제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일본도 명나라도 온전하지는 못했다. 도요토미의 무리한 전쟁은 도쿠카와 정권이 들어서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명나라는 국력의 과도한 소비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명나라의 파병은 후일 조선의 유학자에게 이른바‘재조(再造)의 은혜’로 인식되어 숭명사상을 고취하는 바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