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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택선(安宅船)

안택선(아다께) 모형

▲ 안택선(아다께) 모형

안택형 군선은 임진왜란 무렵의 일본 최대의 군선이다. 당시의 일본 군선은 중세의 해적들이 전국제후(戰國諸侯)의 수군에 편입되면서 발달하기 시작한 것으로써 안택형 군선도 전국시대에 생겨났다. 그러나 그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기주 안택포 설 등이 있을 뿐 분명하지는 않다.

안택선의 규격은 일정하지 못하고 수군의 각 유파에 따라 그 크기와 선체구조와 의장 등이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어떤 통일된 전형적인 특성을 제시하기 어렵지만 일본해사사학회의 석정겸치(石井謙治) 회장은 다음과 같이 안택선의 특성을 종합하였다.

안택선은 그 크기가 작은 것이 500석실이 급이고, 보통 것이 1,000 이상 2,000석실이 급이다. 노는 혼자서 젓는 소노면 50정에서 160정까지이고, 두 사람이 젓는 대노면 그 6할 정도이다. 선수는 문을 세워 만들었고, 거기에 귀갑형 장갑을 하여 안에 대포를 설치하고 정면으로 포격할 수 있게 한다. 선수에서 선미까지 총시창으로 하고 순판(楯板:방패판)으로 전면을 장갑한다. 그 순판은 녹나무 등을 써서 두께 2〜3촌, 높이 5척 여로 하고, 선미측도 같은 방식으로 둘러쌓는다. 이 순판에는 활이나 소총을 발사하기 위한 총안이 뚫려 있으므로 전후좌우 어디에도 사각(死角)이 없다. 또 일부의 순판은 밑을 정첩으로 하여 바깥쪽으로 눕힐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은 배안의 병사가 적선에 뛰어들 적에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음의 그림을 예를 들어 안택선의 구조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상갑판 위의 층루가 선수 쪽과 선미 쪽에 1개씩 2개로 되어 있다. 앞쪽의 것은 3층 층각이고 뒤쪽의 것은 2층이다. 충무공의 기록에 2층 층각 또는 3층 층각이라 한 것은 이런 모양을 지적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배에는 선체 중앙에 범주 하나가 있다. 그러나 그 노는 한쪽에 10개 또는 11개씩으로 그만한 배를 구동하기에는 부족할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임진왜란에 출전해 온 일본수군의 안택선은 여러 종류가 있었고, 그 중에는 매우 큰 것도 간혹 있었으나, 대개는 작은 안택선이 주종을 이루었다.


관선(關船)

관선

▲ 관선

관선(세끼부네)은 전국시대로부터 강호시대(1603-1867 년간의 일본 도꾸가와 막부시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일본을 대표하는 군선이었다. 그것은 임진왜란 때에 대량으로 건조되어 활용되면서 일본의 대표적인 군선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에는 보다 큰 안택선이 있었으므로 관선은 중형군선에 속했다. 안택선이 근대 해군의 전함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관선은 순양함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도쿠가와 시대가 되어 경장 14년(1609)에 막부가 제후의 수군력 감축을 위하여 500석 실이 이상의 대형선 소유를 금하고 제후가 소유하고 있는 안택선을 일절 몰수하였다. 그렇게 안택선이 수군으로부터 자취를 감춘 후로 막부 말기에 이르기까지 관선은 일본 군선을 대표하는 배가 되었다. 그러므로 관선에 대한 사료는 안택선보다 많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관선은 쾌속을 얻기 위하여 세장하고 홀쭉한 선형을 가지고 다수의 노를 장비하며 독특한 화선형 선수재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관선은 속력을 내기 위하여 노를 많이 두었다. 그러므로 일본의 군선은 크기를 미곡 등을 실을 수 있는 적석수(積石數)보다도 노수(櫓數)를 가지고 나타냈다.

그런 경우에 노 한 자루를 한 사람이 젓는 대노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노의 수가 40정 이상인 것이 보통이다.

임진왜란 무렵의 관선은 그다지 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도꾸가와 막부 시대에 관선은 점차 커져 나갔는데, 17세기 초기에 막부가 500석 실이 이상의 대형선과 안택선의 건조를 금지한 이후로 일본의 제후들이 500석실이 한도까지 관선을 점차 대형화해 나갔기 때문이다. 그런 관선의 노수는 대개 소노로 80정, 대노로 약 50정 정도가 한도였다.

그림과 같이 관선의 선체구조는 모두 기본적으로 전형적인 화선(和船)구조이지만, 쾌속을 생각하여 안택선과 하물선 등보다 홀쭉한 선형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소조(小早)

소조

▲ 소조

관선의 별명을 조선(早船 : 하야부네)이라 했으므로 소형의 관선 즉 소관선을 소조(고바야)라 부른다. 즉 관선과 소조의 차이는 배의 크기에 있었다. 노수를 기준으로 할 때 소조는 전국시대에 30정 이하, 강호시대에는 40정 이하의 작은 군선이었다. 소조는 보통 노가 14〜30정인 쾌속선이었지만, 장갑이 훨씬 간소 용이하고 가벼우면서 속도가 빨라 시창 대신 반원(半垣)이라 부르는 낮은 방패판을 두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점이 그림에도 나타나 있다. 이것은 강호시대의 38정짜리 배이다.

공격력도 30정짜리 배에 겨우 8자루 정도의 소총을 가지고 있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소조는 전투보다도 주로 척후용 또는 연락용 등으로 사용되었다.

조선은 스스로 화약을 개발하고, 총통을 만드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일본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외국에서 만들어진 것을 들여와 사용한 뒤 그 장점을 살려  모방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당시 일본군이 화약병기의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방법은 조선이나 명나라, 또는 오키나와(琉球國)에서 수입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에서는 화약병기의 기술이 일본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였다. 따라서 일본군이 조선에서 화약병기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런 이유로 일본군은 조선이 아닌 명나라 해적들에게서 최초로 철환을 넣고 쏘는 철환화기의 제조 기술을 습득하였다. 그 뒤 일본군은 조선이나 명나라보다 성능이 앞선 최신 병기 화승총(火繩銃), 즉 조총(鳥銃)을 포르투갈 인으로부터 입수하였다.

조총의 가장 특이한 점은 명중률을 높이는 사격 방법이다. 과거 조선의 총통은 심지에 불을 붙여서 쏘는 지화식(指火式) 점화법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종래에 한 손으로 병기를 잡고, 한 손으로 심지에 불을 붙임으로써 조준이 불가능하였던 것에 비해, 조준을 하면서 방아쇠를 당겨 불을 붙여 쏘게 되므로 명중률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조총도 처음에는 성능이 시원치 않았으나, 일본군은 국내의 통일전쟁을 치르면서 그 성능을 더욱 개량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사용하였던 조총의 길이는 1m 전후였고, 구경은 명확하게 규격화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발사하는 탄환의 중량에 따라 몇 가지로 구분하였다. 대체로 개인 화기는 구경이 15~18mm 정도의 6문(匁)부터 10문짜리 조총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납탄을 발사할 경우 사정거리는 최대 500m정도이나 살상(殺傷)을 할 수 있는 거리는 200m 정도였다. 사격 속도는 1분에 4발 정도를 발사했다고 하는데, 다소 과장된 듯하다.

그러나 현재 매년 실시하고 있는 세계 구식총 선수권대회에서 사거리 50m부문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대부분 강호(江戶)시대의 일본제 총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사용하였던 조총이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총신이 짧은 4문 조총(구경 13. 8mm)이나 말 위에서 사용하는 조총[馬上筒], 총신이 긴 저격용 조총도 있었다. 특히 저격용 조총은 성을 방어할 때 성벽 위에서 적병을 저격하기에 알맞게 되어 있었다. 울산의 도산성 전투에서 왜군의 장수가 명나라와 조선의 연합군을 이 화기로 막아 방어하였다는 일본측 기록도 있다.

일본군은 화승식대통(火繩式大筒, 구경 31mm 이상)을 주로 성벽 위나 전선(戰船)에 장착하여 사용하였다. 일본 수군의 연패 소식을 들은 풍신수길은 대형 목조 병선을 건조하도록 명령하였고, 그 배에 화승식대통을 장착케 하였다. 그 후 화승식대통은 선조 30년(1597)의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패퇴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한편 육지에서의 일본군은 기병과 보병으로 이루어졌으며, 보병은 다시 조총수(鳥銃手), 궁수(弓手), 창수(槍手)의 세 부대로 나뉘었다. 전체 전투원 중에서 조총으로 무장된 병사의 비율은 부대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었는데, 10~30% 정도였다. 벽제관에서 전투하였던 타찌바나 토우도라(立花統虎)의 부대를 예로 보면 전투 주체인 조총수는 350명이었고, 창수는 640명, 궁수는 91명으로, 조총수가 창수의 절반 수준이었다.

이러한 일본군의 부대 편제는 당시 유럽의 경우와 유사한 형태를 띠었으며, 전술에 있어서도 왜군은 조총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화기를 이용한 별도의 전술을 개발하였고, 또한 이를 효율적으로 구사하였다.

일본군은 상대방과 대치 상태가 되면 먼저 조총수가 사격을 한다. 그 뒤 2선으로 물러나 다시 장전을 한다. 이때 궁수가 조총수의 탄환 장전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전면에 나서 활을 쏜다. 그 다음 조총수가 다시 나서 사격을 한다. 이렇듯 수차례에 걸친 공격으로 상대방의 전열이 흐트러지면, 창수가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보병 뒤에 대기하고 있던 기병이 일제히 진격하여 백병전을 벌임으로써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즉 원거리 무기인 총과 활, 그리고 접전용 무기인 창을 효과적으로 배합하여 운영함으로써 전술적 효과를 극대화하였으며, 이를 위해 병사들은 전술에 맞추어 강도 높은 훈련을 쌓았다.

임진왜란 초기 전투에서 조선군은 조총을 이용한 화기 전술을 구사하는 일본군에게 번번이 패하였다. 일본군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책이 조선군에게는 없었다. 신립(申砬)의 탄금대 전투가 대표적인 예이다. 신립이 조령을 먼저 점거하고, 길 좌우 5~60리 사이에 사수․포수를 세워 공격하였다면, 일본군은 쉽게 진격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립은 이곳을 버린 채 평야 지역을 택하였고, 그곳에서 궁시와 일부 화기만으로 기병 전술을 구사함으로써 조총 전술을 조직적으로 구사하는 일본군에게 대패하였다. 평야 전에서 화기를 이용한 전술 인식이 부족하였던 것이다.

선조 25년(1592년) 11월, 이항복이 “관군이 왜군과 싸울 때 접근해서 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적의 선봉에는 철포와 칼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한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또한 일본군을 따라 조선에 왔던 서양의 선교사 쎄스뻬데스(Gregorio de Cespedes)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일본인은 고려인이 상상치 못했던 철포[조총]를 가지고 성벽을 포위한다. 그렇게 되면 고려인은 사격의 정면에 설 수 없게 되어 일본인은 아주 쉽게 대나무 사다리를 걸치고 성벽에 벌떼처럼 올라 그 위에 깃발을 세운다. 고려인도 처음에는 어느 정도 저항하였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5백 명 정도의 시체를 남기고 도망가 버린다.

조선군과 일본군과의 성곽 전투 상황을 묘사한 이 기록은 시사하는 면이 크다. 종래 조선은 성을 위주로 전투를 하였다. 주요 지역에 성을 쌓아 적이 침입하면, 주변의 군사와 백성이 그 성에 들어가 적에 항전하는 것이 삼국시대 이래의 전투방식이었다.

조선군은 성벽 아래로 접근하는 적을 제압하기 위해 주로 궁시․창․화기 등의 무기를 사용하였다. 적이 아래로 접근하면, 궁시와 화기로 일단 적을 살상하고, 사다리를 통해 올라오는 적을 창으로 찌르고 사다리를 넘어뜨리는 것이 조선의 핵심전술이었다.

그런데 일본군이 조총을 사용하면서부터 상황은 돌변하였다. 일본군은 조직적인 화기전술을 구사하였는데, 조총의 성능은 조선군의 화기나 궁시보다 훨씬 뛰어났다. 결국 일본군이 조총을 사용함으로써 조선의 관군들은 성벽 위에서 제대로 공격을 펼칠 수가 없었다. 일본군은 이 틈을 이용하여 재빠르게 사다리를 성벽에 걸치고 올라와 그들의 주무기인 칼로 조선군을 제압해 버렸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군은 조총을 이용한 육지전투에서 조선 관군보다 우세한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전에서는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 수군의 무기체계가 일본의 조총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조총의 최대사거리가 200미터였고 유효살해사거리가 50미터인 데 비하여 조선 수군의 총통은 피사체에 따라 사거리가 1㎞내외로 조총보다 훨씬 길었다. 따라서 조선 수군은 이를 이용하여 근접전을 하지 않고 원거리에서 공격을 함으로써 적의 예봉을 꺾었기 때문이다. 조선 수군이 치른 해전 중 칠천량, 명량, 노량 해전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전술로써 일본 수군을 물리쳤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