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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

판옥선 사진

▲ 판옥선 사진

1. 개발의 경위

임진왜란에서 화려하게 각광을 받은 판옥선이 등장하게 된 이유는 명종 대에 자주 일어난 왜구들의 침략 때문이었다.
여말선초에 극성하던 왜구가 조선왕조가 베푼 강경 무마의 양책으로 진무되어 세종중엽부터 한동안 왜와의 관계는 무사하였던 것인데, 삼포왜란으로 다시 험악해지고 을묘왜변을 거쳐 드디어 임진왜란이 발발하기에 이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종 5년(1510)에 일어난 삼포왜란은 조선의 처우에 불만을 품은 삼포의 거류민과 대마도주가 합세하여 병선 수백 척을 가지고 쳐들어와서 부산첨사를 살해하고 제포를 점령하여 그 첨사를 납치하였고, 웅천성을 포위하여 성내의 민가에 방화를 하고 분탕하는 등 난동을 자행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한일관계가 다시 시끄러워지고 그간에 숨을 죽였던 왜구가 다시 고개를 드는 계기가 된 변란이었다. 이 때 조선의 군선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채 모두 소각당하고 말았다. 조선 군선의 허점이 여지없이 드러났던 것이다.

삼포왜란은 그 2년 후 임신약조를 체결함으로써 겨우 마무리가 되었으나, 왜는 중종 1718년(1522 1523)에 다시 전라도와 황해도에 침범해 들어왔다. 이때의 침범은 그 규모가 별달리 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10여 척이 떼 지어 횡행하며 무방비상태에 있었던 황해도까지 침입을 하고 적선의 장비도 전보다 개량되었다는 점 등으로 조선 측의 놀라움은 대단했다.

이후 약 20년이 경과한 중종 36년경부터 왜구가 다시 성해지기 시작하여 마침내 중종 39년 4월 왜선 20여 척이 경상도 사량진에 침입하여 이른바 사량왜변을 일으켰다. 이때 그들은 선단의 규모는 작으나 명의 복건성 연안의 중국 해적들로부터 화포를 비롯한 화약병기를 공급받아 소유하고 있는 등 기세가 매우 강성했다.

사량왜변은 그 3년 후인 명종 2년에 정미약조를 체결함으로써 일단 낙착이 되었지만, 왜는 명종 7년경부터 다시 침구해 오기 시작하여 드디어 명종 10년(1555)에는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동년 5~6월에 왜선 70여 척이 전남 해남군 달량포에 침입하여 전라병사와 장흥부사를 살해하고 영암까지도 침입하는 등 연해일대를 횡행하며 분탕살육을 자행했다. 이 변란은 삼포왜란 이후로 가장 규모가 컸다. 이때의 왜선은 중국인들로부터 조선(造船)을 배워 구조가 견고해지고 총통을 쓰는 법도 매우 능숙하여, 적의 세력은 삼포왜란 때와 비할 수 없을 만큼 강성해서 감당하기 힘들었다.

이상과 같이 중종 명종 대에 파상적으로 왜침이 일어나는 상황 하에서 수군의 군비와 군선의 성능이 문제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의 군선은 맹선 따위이지만, 이것은 평화로운 시대에는 조운을 겸하는 겸용선이었던 만큼 삼포왜란 이후 속출하는 변란에 아무런 소용이 닿지 않았다. 맹선은 적을 막는 데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비판만이 높았다. 하는 수 없이 맹선은 버려두고 한동안 10명 정도의 병사를 가지고 운용이 되는 소형경쾌선을 이용해 보았다. 당초에는 왜구가 매우 작은 배를 타고 침입해 왔으므로 다소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그 후 왜적은 점차로 더 큰 배와 보다 개량된 무기를 가지고 침입해 오기에 이르렀다. 가령 중종 18년경부터 왜는 대맹선만한 크기의 배와 화포, 화통 등 무기를 가지고 오더니, 그 후 그 위세가 점차로 더 강성해져서 명종 10년의 을묘왜변 무렵에는 더 고대견실한 배와 더 강력한 화기를 가지고 침입해 와서 대맹선이나 소형경쾌선 따위를 가지고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왜의 세력이 강해진 것은 그들이 중국 연안에 진출하여 중국의 해적들과 합류하여 그들로부터 조선(造船)과 화기의 기술을 배운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우리는 왜구를 진압하는 데 있어서는 보다 큰 배와 화기를 가지고 대처해온 터인데, 왜선이 오히려 더 커지고 화포도 더 잘 구사하게 된 것은 큰 문제였다.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하자 종래의 맹선이나 소형 경쾌선을 가지고는 적을 막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 적선을 능히 제압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군선 개발에 부심한 결과 판옥선이 출현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이 시대에 새로운 군선의 개발을 제일 먼저 주장한 이는 수전용 벽력포를 창제한 바 있는 서후(徐厚)라는 사람이다. 그는 중종 16년에 임금 앞에서 “지금 수군에서는 소선(小船)만을 쓰고 있지만 소선은 아무리 민첩하더라도 접전에서는 쓸모가 없고, 적이 칼을 빼어들고 뛰어들 수 없는 높고 큰 대함을 가지고 적을 내려다보며 제압해야합니다.”라는 뜻의 진언을 했다. 또 중종 39년 판중추부사 송흠(宋欽)도 대함을 개발하여 적을 제압해야 할 필요성을 누누이 상소한 바 있다.

그리하여 판옥선은 을묘왜변이 일어난 명종 10년 9월 왕의 참관 하에 망원정 앞 강에서 시험하여 성공을 거둠으로써 탄생하였다.


각선도본 사진

▲ 각선도본 사진

2. 구조와 기능

(1) 구조

다음 그림은 〈각선도본〉중에 나타난 것을 게재한 것이다. 여기서 보면 선체는 노가 꽂혀있는 자리를 경계로 하여 그 아랫부분과 그 윗부분, 그리고 갑판 위의 다락 등 세 부분으로 구별할 수 있다. 그 아랫부분은 배의 본체이고 윗부분은 상장이라 이르는 상부구조이고, 다락은 수사나 선장(船將)이 사용하는 지휘소로서 장대라 하는데 현대 함정의 사령탑과 유사하다.

선미 외판에는 꼬리가 힘차게 치솟아 있는 것이 인상적인데 이 같은 꼬리 모양은 군선에서 특히 심한 것이지만, 그것은 위용을 자랑하는 한편 파도로부터 타를 보호하는 기능도 가지게 된다.


판옥선의 하체부분은 선저에 평탄하게 넓은 저판을 깔고 좌 우현에 외판을 세워 붙이고 선수부와 선미부에도 평면으로 된 선수재와 선미재를 세워서 각각 저판 및 외판과 고착하여 상자모양의 피각(皮殼)을 만들고, 거기에 필요한 만큼 양재(梁材)와 가룡목(加龍木)을 결착시키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선체의 구조방식은 판옥선만이 아니라 한국의 모든 배에 공통되는 전형적인 한선 구조방식이다.


판옥선의 특이한 점은 하부 선체가 아니라 그 상부의 상장구조이다. 다음의 그림은 판옥선의 상장부분을 알아볼 수 있게 그린 단면도이다. 그림에서 보다시피 현란〔밑도리〕, 주목〔기둥〕, 패란〔윗도리〕, 패판, 상가목, 아래위의 갑판 및 여장〔난간〕등으로 구성되고, 필요한 만큼 상하 갑판 사이에 양주를 세워 놓는다. 이들은 마치 건축물의 2층과 같은 공간을 이루고 판자를 가지고 옥(屋)을 꾸몄다고 해서 판옥선이라는 이름도 당초에 생겼다.
그리고 상장갑판 위에 여장이라는 난간을 세우고, 그 갑판 위에 사령탑이라 할 수 있는 다락인 장대(將臺)를 구조한다.

이상과 같은 판옥구조는 오로지 판옥선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의 군선으로서 상장이 큰 것들도 있으나 판옥선처럼 선체 전면에 걸쳐 상장을 구조한 배는 없다.

판옥선전도 사진

▲ 판옥선전도 사진


판옥선의 구조 사진

▲ 판옥선의 구조 사진

(2)기능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판옥선은 2층으로 구조된 배이다. 종래의 군선은 갑판이 하나뿐인 평선이고 기껏 갑판 위에 다락을 세워 놓은 것이 고작이었는데, 판옥선은 상장을 구조하여 갑판을 이중으로 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뛰어난 기능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우선 첫째로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갈라놓고 비전투원인 격군(格軍)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점이다. 판옥선은 노군들이 판옥 내에 자리 잡고 적에게 노출됨이 없이 노 젓는 일에만 전념하고, 전사들이 상갑판 위의 높은 자리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전투에 임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정말로 탁월한 기능이다.

사실 맹선 같은 단층갑판의 평선에서 포수와 사부 등 전투원과 전투력이 전혀 없는 노군이 한곳에 모여 전투에 임한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노군은 겁을 먹어 자기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전사들도 비좁은 장소에서 혼잡하여 전투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판옥선은 갑판을 2층으로 함으로써 그런 문제를 쉽게 해결했다. 노군은 상장 안의 은폐된 장소에서 마음 놓고 노역에 전념하고, 전사들은 상갑판 위 넓은 장소에서 노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전투를 전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둘째로 전사들이 높은 자리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전투에 임할 수 있게 된 점이고, 셋째로 적이 접근하여 배에 뛰어들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장점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해전의 전술과도 관계가 있다.
일본 수군의 전법은 무조건 적선에 접근해서 배에 뛰어들어 1대 1의 백병전을 벌여 적선을 점령해 버리는 수법이다. 말하자면 일본인들의 해전 전술은 검술을 바탕으로 하는 접현전(boarding tactics)으로 이를 등선백병전(登船白兵戰)이라고도 한다.
이에 대하여 우리 수군의 전술은 적선을 어느 정도의 거리에 떼어 놓고 활로 적을 사살하고, 불화살을 쏘아 배를 태워버리든가 포탄을 사용하여 격침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판옥선은 적의 장기인 접전을 막고 우리의 장기인 포술전을 유리하게 전개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배이다. 또한 판옥선은 선체가 2층으로 되어 있어서 적이 아무리 접근해도 기어오르기가 매우 힘들게 되어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임진왜란에 관한 일본 측 기록에 조선의 군선은 성벽처럼 높아서 난공불락이었다는 내용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넷째로 판옥선은 포의 위치가 높아서 포격전에 매우 유리한 배이다. 당대의 화포는 그 사정거리가 고작 수백보인 것들이어서 포좌가 높을수록 명중률이 크게 향상되었는데, 판옥선은 상장갑판 위에 포를 안치하므로 포좌가 충분히 높아서 접근해 오는 적선을 내려다보며 포격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각 해전에 있어서의 조선 수군의 압승은 분명히 판옥선과 함포의 위력 덕분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로 판옥선은 종래의 배에 비해서 선체가 커졌고 기동성이 매우 좋았다. 판옥선은 노 한 자루에 5명씩의 노군을 배치하였는데, 이것은 판옥구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은폐된 장소에서 노역에 전념할 수 있었으므로 판옥선의 기동성이 좋은 것은 당연하다.

(3)크기

개발당초부터 임진왜란 무렵까지의 판옥선의 크기는 분명치 않다. 이순신은 130여 명이 탑승했다고 하였으며, 임진왜란에 종군했던 나대용이 올린 상소문에는 125명 이상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전대의 대맹선의 정원이 80명에 불과했다는 한 가지 사실로 미루어보더라도 판옥선이 매우 큰 배였다는 것은 수긍할 수 있다.

판옥선의 크기에 대하여는 숙종 13년(1687)의 기록에 나타나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광해군 7년(1615) 수군을 재건하기 위하여 권반(權盼)을 삼남 수영에 순검사로 파견하였는데, 그가 통제사 및 수군 장졸들과 상의하여 가지고 군선의 크기와 그 집물을 절목으로 정하여 반포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배의 크기는 저판의 길이를 기준으로 하여 통제사와 수사가 타는 배는 70척(尺), 그 다음 크기의 배는 55척, 또 그다음 배는 47.5~50척으로 정했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당시까지 살아남아 있던 노졸들과도 상의한 끝에 정해진 바이니만큼, 그 배의 크기는 곧 임진왜란 당시의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해서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판옥선의 정원은 130명이라는 기록을 통해볼 때 저판의 길이가 47.5~50척인 가장 작은 판옥선의 것으로 볼 수 있고, 이후 판옥선의 크기는 더욱 커져서 삼도수군통제사가 탑승하는 통영상선은 저판길이가 90척, 각 읍진의 일반전선은 저판길이가 65척으로 되어 있으며, 이들의 정원은 각각 194명과 164명이고, 그 노의 수는 각각 20개와 16개로 계산된다.

이런 점을 종합해서 보면,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하 수사급 지휘관이 탑승한 판옥선은 저판길이 65~70척, 탑승인원 160명, 노 16자루로서 후세의 일반전선만한 크기이고, 기타 수군장들이 탑승한 판옥선은 저판길이 50~55척, 탑승인원 130명, 노 12~14자루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된다. 임진왜란 이후에 판옥선의 크기는 점점 더 커졌는데, 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은 종래의 배에 비하면 크기와 정원에 있어서 파격적인 군선이었던 것이다.


거북선

거북선 사진

▲ 거북선 사진

거북선은 조선 수군이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데 앞장섰던 특수군선이다. 거북선은 항상 함대의 선봉이 되어 적중에 뛰어들어 맹활약함으로써 조선 수군이 일본군을 완전히 제압하여 쾌승을 거두는 원동력이 되었다.

동서고금의 해전사에는 군함들이 수없이 동원되고 그 종류도 다양했지만 거북선처럼 탁월한 성능을 갖고 결정적인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다한 전투함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살라미스 해전, 트라팔가 해전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해전이 있지만, 임진왜란에서 조선수군이 거둔 승리처럼 일방적인 쾌승은 없었고 더욱이 거북선에 비할 만큼 신기하고 결정적인 군함도 등장하지 못했다.


1.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

우리들이 알고 있는 거북선은 배의 앞에 부착된 거북머리(龜頭)와 그 입으로 연기를 토하는 모습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은 이순신이 1592년 6월 14일 해전을 보고한 계본(啓本)에 따르면 거북머리(龜頭)가 아닌 용두(龍頭)였고 용의 입으로 포를 쏘았다.

신은 일찍이 왜적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선을 건조하였습니다.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어 붙이고 그 입으로 대포를 쏘며, 등에는 쇠못[鐵尖]을 꽂았고 안에서는 밖을 내다 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이라도 뚫고 들어가서 대포를 쏘게 되어 있습니다.

명나라 화옥(華鈺)의 《해방의(海防議)》에 의하면 “조선의 귀선(龜船)은 돛대를 세우고 눕히기를 임의로 하고 역풍이건 퇴조 때이건 마음대로 갈 수 있다”라 한 것으로 보아 그 성능의 우수성은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후 ‘바다를 침범한 적은 바다에서 무찌른다.’는 굳건한 의지로써 그 당시의 전선과 해전양상 등을 고려하여 전투원의 안전과 함께 적에게 위용을 보이면서 돌격할 수 있는 거북선을 만들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규모로 만들어진 배였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그 당시의 거북선의 일반적인 구조와 성능에 관하여는 이순신의 조카이며, 정유재란 때 숙부를 따라 종군한 바 있는 이분(李芬)의 〈행록〉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크기는 판옥선과 같고 위는 판자로 덮었다. 판 위에는 십자형 세로(細路)가 있어 사람이 통행할 수 있고, 그 외는 모두 칼 모양의 송곳[刀錐]을 꽂아 사방에 발붙일 곳이 없도록 하였다.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어 그 입을 총혈이 되게 하고,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그 꼬리 아래 총구멍을 내었다. 좌우에는 각각 6문의 총구멍을 내었는데, 그 전체의 모양이 대략 거북과 같으므로 그 명칭을 거북선이라 하였다. 적을 만나 싸울 때는 거적으로 끝이 뾰족한 칼[錐刀] 위를 덮고 선봉이 되어 나아갔다. 적이 배에 올라 덤비려 들다가는 칼 모양의 송곳[刀錐]에 찔려서 거꾸러지고, 또 에워싸고 엄습하려 하면 좌우와 전후에서 일시에 총을 쏘니, 적선이 바다를 덮어 모여 들어도 이 배는 그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가는 곳마다 쓰러지지 않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전후 크고 작은 해전에 이것으로서 항상 승리를 하였다.

복원 거북선

▲ 복원 거북선(해군사관학교 내)

위의 기록에서 충무공의 장계에서는 기록하지 않았던 거북선의 크기가 그 당시의 판옥전선과 같다는 점, 포혈이 모두 14개였다는 점, 외형적 특성과 전투장에서의 기능 등을 말하고 있으나 역시 세부적인 치수와 내부의 구조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임진왜란 당시에 전공을 세운 거북선의 크기와 외형은 판옥전선과 거의 같으나 승조원의 보호와 전투력을 고려하여 윗부분을 개장하고 쇠못을 꽂아 거북이 형으로 건조하되 앞에는 용의 머리를 붙이고 그 입으로는 포를 쏘게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우리들이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형 거북선의 용머리(거북머리)와 같은 형태로는 포를 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모든 포들이 포미에서 피사체(탄약)를 장진하여 발사하지만, 그 당시는 모든 포들이 포구로 화약과 피사체를 넣은 다음에 포미에서 불심지를 넣어서 발사하게 되었으므로 매우 불편한 것이었다. 거북선의 경우도 이러한 포의 작동방법을 고려할 때 용머리와 용의 입이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졌을 것인가 하는 것이 지금까지 연구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200년 후의 문헌에 나타난 거북선

《이충무공전서》는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전집으로 임진왜란이 끝나고 약 200년이 지난 정조 19년(1795) 왕명에 의하여 규장각에서 편찬된 책이다. 당시 각신(閣臣) 자리에 있던 윤행임(尹行恁)이 편찬을 담당하고 검서(檢書던 유득공(兪得恭)이 감독하여 임금이 내린 내도금으로 간행했다. 그 책자의 권수〈도설〉에는 거북선 그림 2개가 나와 있다. 그 첫째 그림 제1도는 귀선이라 되어있고, 둘째그림에는 전라좌수영귀선이라 되어있다.

그리고 한문자 694자로 되어있는 설명문이 붙어있다. 거기에는 “통제영 거북선은 대개 충무공의 옛 제도에서 된 것이나 약간의 치수의 가감은 없지 않다”하였으며, 그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통제영 귀선도

▲ 통제영 귀선도

먼저 통제영 거북선은

“귀선의 제도는 속명을 본판이라 하는 저판을 10장 이어 붙였는데, 길이는 64자 8치이며, 머리쪽 넓이는 12자이고, 허리쪽 넓이는 14자 5치이며, 꼬리쪽 넓이는 10자 6치이다. 좌우현판은 각각 7장씩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7자 5치이고 맨 아래 제1판의 길이는 68자이며, 차례로 길이를 더하여 맨 위 일곱째 판자에 이르러선 길이가 113자이고, 두께는 다같이 4치씩이다. 속명이 하판인 노판(艫版)은 4장을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4자이고, 둘째 판자 좌우에 현자포 구멍이 하나씩 뚫려있다. 속명이 역시 하판인 축판(舳版)은 7매를 이어 붙였는데 높이는 7자 5치이고, 윗넓이는 14자 5치이며, 아래넓이는 10자 5치인데 여섯째 판자 한가운데 직경 1자 2치 되는 구멍을 뚫어 속명이 치(鴟)인 타(舵)를 꽂게 되어있다.
좌우 뱃전에는 속명을 신방(信防)이라 하는 란(欄)을 설치하고, 난 머리에 속명을 가룡(駕龍)이라 하는 횡량(橫梁)을 걸쳤는데 바로 뱃머리 앞에 닿게 되어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 메인 것과 같다.

난간을 따라 판자를 깔고 그 둘레에 방패판을 둘러 꽂았으며, 방패판 위에 또 속명을 언방(偃防)이라 하는 난을 설치하였는데 현란에서 패란까지의 높이는 4자 3치이고, 패란 좌우에 각각 속명을 개판 또는 귀배판(龜背版)이라고 하는 11개의 판자를 비늘처럼 서로 마주 덮고, 그 등에 1자 5치 되는 틈을 내어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뱃머리에 거북머리를 설치하였는데 길이는 4자 3치, 넓이는 3자이고 그 속에서 유황 염초를 태워 벌어진 입으로 연기를 안개같이 토하여 적을 혼미케 한다.
좌우의 노는 각각 10개씩이고 좌우 방패판에는 각각 22개씩의 포구멍을 뚫었으며, 12개의 문을 설치하였다. 거북머리 위에도 2개의 포구멍을 뚫었고, 아래에 2개의 문을 설치했으며, 문 곁에도 각각 포구멍이 1개씩 있다. 좌우 복판에도 또한 각각 12개의 포구멍을 뚫었으며 귀(龜)자 기를 꽂았다.
좌우 포판(舖板)아래 방이 각각 12간인데, 2간은 철물을 쟁였고 3간은 화포 궁시 창검을 갈라두며 19간은 군사들이 쉬는 곳으로 되어 있다. 왼쪽 포판 위의 방 한간은 선장이 쓰고, 오른 쪽 포판 위의 방 한간은 장령들이 거처하였다. 군사들이 쉴 때에는 포판 아래에 있고 싸울 때에는 포판 위로 올라와 모든 포구멍에 포를 걸어 놓고 쉴새없이 쟁여 쏘아댄다.”

전라좌수영 거북선

▲ 전라좌수영 거북선

다음으로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치수와 길이 넓이 등은 통제영 거북선과 거의 같으나, 다만 거북머리 아래 또 귀두(鬼頭)를 붙였으며, 복판 위에 거북무늬를 그렸고 좌우에 각각 2개씩의 문이 있으며, 거북머리 아래 2개의 포구멍이 있고 현판 좌우에 각각 10개씩의 포구멍을 내었고, 복판 좌우에 각각 6개씩의 포구멍을 내었고, 좌우의 노는 각각 8개씩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전서의 거북선은 외형상에 있어서 충무공 활동 당시의 거북선과 다른 점이 있다. 이를테면 임진왜란 때는 포문수가 14문인데 전서에는 36문(좌수영 거북선)에서 72문(통제영 거북선)에 까지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개판 위의 쇠못은 없어지고 그 대신 거북무늬를 덮었고, 포를 쏘는 용머리는 거북머리로 변하여 연기를 토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전해 오는 문헌 중에는 우리들이 알고자 하는 일반 성능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만 충무공의 일기와 장계 내용에 따르면 거북선의 승조 인원은 130여 명이며 속력은 최대 6노트(시속 11㎞)정도였고 톤수는 약 100톤 정도로서 주로 전투시 돌격선으로 활용되었다.


한편 임진왜란 때 거북선이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한 것은 1592년 5월 29일의 사천해전이었으며, 그 후 당포 당항포 해전을 거쳐 한산대첩 때 큰 공을 세웠다. 거북선 척수는 임진왜란 초기에는 3척에 불과하였고, 이후 1595년 초에는 5척이 확인되며, 이후 2~3척을 더 건조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하기까지 약 7~8척 정도 활약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광해군대부터는 거북선의 효용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함으로써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나 정조 대에는 40척까지 증가하였으며, 그 후 척수는 감소하여 1895년 삼도수군통제영이 혁파되면서 거북선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전라좌수영 귀선도

▲ 전라좌수영 귀선도


개인 휴대 무기

1. 활과 화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무기는 활이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궁술(弓術)을 중요시하였으며, 화포가 출현하기 전까지 활과 화살은 가장 주된 전투무기였다. 조선 전기에 화약 무기가 크게 보급되었지만, 전투병기로서 활에 대한 의존도는 컸다. 화약 무기의 보급이 일반화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술은 화약 무기의 여러 가지 결함을 보완시켜 줄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선 왕조는 활쏘기가 덕(德)을 기르는 수단이라고 생각하여 사대부 자제들의 소양교육을 하는 데 있어 활쏘기는 필수였다. 특히 무관을 뽑는 무과(武科)에서 활쏘기는 가장 기본적인 과목이었다.

활은 원래 짐승을 사냥하는 도구로 만들어졌다. 활은 예로부터 동이족(東夷族)의 맥궁(貊弓)이 유명하였다. 사서(史書)에서는 이를 단궁(檀弓)이니 각궁(角弓)이라 일컫고 있다. 동이(東夷)는 바로 우리나라 사람을 가리킨다. 이(夷)라는 글자는 대(大)와 궁(弓)을 합한 모양이다. 즉 ‘큰 활을 찬 사람들, 또는 활을 잘 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활을 잘 쏘았다는 것은 고구려의 양만춘 장군이 안시성 꼭대기에서 쏜 화살이 당나라 태종의 눈을 꿰뚫었다는 일화를 통해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정도라면 옛말에 ‘시위를 떠난 화살은 천 보를 간다’고 한 것이 지나친 과장은 아닐 것이다.

2. 도와 검

도(刀)와 검(劍)은 조선시대 군사들의 개인 휴대무기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단병기이다. 도(刀)는 날이 한쪽에만 있으며, 곡선의 형태로 되어 있고, 자루가 길고 칼집이 없다. 주로 적군의 목을 베는 살상용으로 사용되었다. 반면에 검(劍)은 날이 양쪽에 있으며, 형태는 직선으로 되어 있고, 도에 비해 자루가 짧고 칼집이 있다. 검은 베기도 하지만 찔러서 살상효과를 내는 무기였다.

도와 검은 애초에는 혼용되었으나, 전장에서의 쓰임새와 제작 상 장점을 살려 점차 도는 전투용으로 보편화되었다. 전투용으로 도가 널리 쓰이게 되자, 검에만 있던 칼집을 도에도 갖추게 하였다. 이는 전투복에 편리하게 차고 다니기 위해서였다. 한편 검은 칼날을 중시하는 데에서 벗어나 자루 장식에 치중하는 경향으로 바뀌었다. 이른바 상감(象嵌)의 방법으로 꽃무늬나 별자리 같은 문양을 새기고 의미 깊은 문구를 새겼으며, 옥을 검에 매달거나 박은 옥구검(玉具劍)등이 등장하였다.

도검은 전투용에서부터 수렵용, 지휘용, 의례용, 장식용, 호신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또 크기에 따라서 장검(장도 대도)과 단검(단도)으로도 구분한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도검으로는 환도(環刀)예도(銳刀)인검(寅劍)운검(雲劍)칠성검(七星劍) 등이 있다. 전투용 도가 보편화됨에 따라 조선 조정은 군사의 기본 무기인 환도를 규격화하게 되었다. 특히 문종은 환도를 규격화하여 기병용은 칼날 길이를 1척 6촌, 자루를 1권(拳) 3지(指)로 하였고, 보병용은 칼날 길이를 1척 7촌 3푼, 자루를 2권으로 하였다. 그런데 개인마다 근력의 차이가 있어 실제로는 그러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조선 전기 환도의 크기는 조선 후기의 규격과 비교할 때 절반 수준에 불과하였는데, 이는 실전(實戰)을 위해 길이가 짧거나, 곧은 것[直短]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진(女眞)과의 전투의 주된 전투무기가 궁시였고, 환도는 긴박한 상황에서나 사용하는 일종의 방신용(防身用)이나 호신용의 보조무기에 불과하였던 데서 그 기능의 특성이 나타난다. 그러나 환도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의 접근전 때 주무기로 사용되었다. 왜군의 검(劍)은 길이가 3~4척인데 비해 환도는 짧고 예리하지도 못하여 왜군과 백병전에서 효과적이지 못하였다. 이에 길이가 길고 예리한 예도가 나타났다. 따라서 조선 전기의 환도가 여진과의 전투의 산물이라면, 후기의 예도(銳刀)는 일본과의 전쟁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3. 기타 무기

조선수군이 사용했던 무기로서 장병겸(長柄鎌)과 사조구(四爪鉤)가 있다. 장병겸은 일본 수군이 헤엄쳐 아군의 전선 위로 올라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는데, 이것으로써 배 밑바닥을 긁어 적의 등선(登船)을 막았던 것이다.

장병겸의 형태는 큰 낫의 모습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것의 제원은 날의 길이는 1척 6촌(48㎝), 너비는 3촌(9㎝), 자루는 가새목(지붕틀과 지붕틀 사이에 건너지르는 목재)으로 만들었는데, 길이는 14척 2촌(426㎝), 못 두개를 가로 꿰어 흔들리지 않게 하였다.

사조구는 적선이 가까이 있을 때 이것을 던져 적선을 잡아끄는 데 사용하였으며, 거리가 멀면 삼바를 이어 쓴다. 이 사조구의 형태는 쇠로 만들었고, 한 대궁에 네 개의 갈고리가 달려 있다. 제원은 갈고리의 길이는 1척 5촌(45㎝)이며, 둘레는 5촌(15㎝), 대궁 끝에 쇠로 만든 사슬을 꿰었는데 사슬길이는 28척(840㎝)이다.

위의 두 가지 무기는 이순신이 창안하여 사용한 것들이다.

화약무기

1. 화약무기의 발달과정

당시의 첨단무기에 꼭 필요한 화약을 개발한 시기는 송나라 태조 때(960~975)였고, 1232년 금나라에서 비화전(신기전)으로 최초 사용하였으며, 14세기 초에 이르러 원나라에서 화포를 개발하여 유럽 원정시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제조법은 극비에 부쳤다.

최무선은 화약제조법을 아는 중국 상인 이원(李元)을 집에 초대하여 그 원리를 발견함으로써 화약제조에 성공하였고, 이후 우왕 3년(1377)에 화통도감에서 화약을 제조하면서 18종의 화기를 생산하였다. 우왕 6년(1380) 8월에 금강어귀의 진포해전시 왜선 500척을 맞아 상원수 나세, 도원수 심덕부, 부원수 최무선이 합동으로 우리 전선 100척에 화포를 장착하여 적선에 발사, 분멸시켰다. 또한 우왕 9년(1383) 5월에는 해도원수 정지장군이 남해 관음포에서 전선 47척으로 왜적선 120척을 대파하였고, 창왕 원년(1389)에는 경상도도원수 박위가 100여 척의 군선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여 300여 척을 격침시켰다.

조선조에 들어와 최무선의 아들 해산이 태종 원년에 출사하여 세종 10년까지 30년간 군기시(軍器寺)에서 활약을 하였다. 특히 태종, 세종, 문종은 화기를 보급하고 개량하는 데 주력하였는데, 조선초기에는 육전용 화기를 중시하다가 조선중기 이후 수전용 화기를 중시하였다. 중종 6년에 수전용 벽력포를 개발했고, 중종 17년에는 신기전 총통, 20년에는 새로운 장군전 발사용 대포를 제작하였다. 그러다가 명종 10~18년 동안 동철 10만근으로 천, 지, 현, 황 등 총통을 대량으로 주조하였다.

총통이란 총포(, Fire­arms)을 일컫는 말인데, 총과 포를 합한 복합 용어이다. 총포의 분류는 포구(砲口, 부리)의 크기로써 구분하였다.

총(rifle)은 구경(口徑)이 25mm 이하의 작은 화기를 일컬으며, 승자총통 등 소형 총통류가 이에 속한다. 포는 대포(gun)를 가리키며, 천자 지자 현자 황자 별황자 총통, 그리고 불랑기 같은 대형 화기가 이에 속한다.

포는 탄환이 날아가는 모양에 따라 평사포와 곡사포로 나눈다. 평사포는 말 그대로 탄환이 수평으로 날아가는 포이며, 곡사포는 15도 이상의 고각으로 장애물을 넘어 목표물에 떨어지게 하는 포이다.

임진왜란 당시 대형 총통은 크기에 관계없이 모두 평사포였는데, 이를 곡사포처럼 사용하였다. 반면 완구는 순수한 곡사포라 할 수 있다.

조선수군은 해상의 특성을 살려 따로 개발한 화기는 아니지만, 육상에서 사용하던 화기를 그대로 전선(戰船)에 싣고서 사용하였다. 특히 천자총통이나 지자총통 같은 경우는 무게가 각각 300kg, 90kg에 달하여 사람의 힘만으로 이동하기에 매우 불편하였다. 그러나 일단 배에 싣기만 하면 매우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무기였다.

이런 총통을 운영하려면 대체 몇 명의 수군이 필요했을까? 총통 하나의 무게가 300kg이나 되는데, 이를 어떻게 옮겼으며, 옮겨 놓은 총통을 쏠 때마다 어떻게 조준했을까? 총통 발사에 필요한 인원은 《세종실록》(118권)에 이렇게 씌어 있다.

총통군은 5명을 1오(俉)라 한다. 4명은 총통을 쏘는 일을 맡고, 나머지 1명은 화약을 넣고 불을 붙이는 이른바 장약(藏藥)을 맡는다. 총통을 쏘는 데 필요한 격목 철전 화약 심지[火心] 자(화약의 양을 재는 기구), 기타 장약에 필요한 기구들을 종전에는 총통 쏘는 사람이 각기 자기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무거워 불편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러므로 한 오 안에서 장약을 맡은 사람[助手]이 그에 필요한 기구들을 항상 말에 싣고 다니면서 보급한다. 그 반면에 총통을 쏘는 사람은 활과 화살, 그리고 칼을 가지고 다녔다.

하나의 총통 운용에 필요한 인원은 5명이라고 하였다. 총통을 쏘는 4명도 총통전이나 철환을 장전하는 병력, 격목을 넣는 병력 등으로 역할이 나뉘어 진다. 그리고 총통이 무겁기 때문에 일단 전선에 싣고 나면 총통을 쏠 때 외에는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았다. 일정한 곳에 고정해 놓고 총통을 쏘았다. 그럴 경우 총통의 위치는 틀림없이 뱃전이었을 것이다. 그 뱃전까지 총통을 옮기는 수단으로 동차(童車)를 이용하였다. 총통군은 이 총통을 얹은 동차를 걸어 매고 푸는 일도 하였을 것이다. 이런 화기들을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하여 많은 양의 화약을 준비해 놓아야 한다.

2. 총통류

당시 왜군과 해상전을 벌인 충무공은 과연 어떤 화포를 어떻게 사용하였을까? 임진왜란 당시 해전에서 사용하였던 화기는 표에서 보는 것처럼 20여 종에 이르렀다. 조선 수군이 왜군을 물리치는 데 이러한 화기들은 핵심 역할을 해냈다.

《난중일기》에서는 총통을 포(砲)라고 하였고, 장계에서는 대포(大砲)라 하였으며, 용 아가리로 현자포를 쏘았다고 하였다. 거북선에서 사용된 포는 천자 지자 현자 황자총통과 여러 총통[各樣銃筒]이라고 하였다.

총통류
종류 내용

천자총통

천자총통
천자총통은 대체로 무게가 300kg, 길이가 130cm, 구경 130mm이고, 여기에 넣어서 쏘는 대장군전은 길이가 227~250cm(11자 9치), 지름이 116~124mm(5치)이다. 이것은 대형 총통의 공통적인 특징인데, 피사체 무게가 무거우므로 최대사정거리가 곧 유효사정거리다. 유효사정거리는 탄환이 날아가서 적을 맞히거나 적의 배를 부술 수 있는 거리를 말한다.  탄환이 가벼우면 유효사정거리도 짧아진다. 반대로 탄환이 무거우면 그 탄환의 무게에 의해 멀리 못 가고 떨어져도 그 중력으로 인해 파괴력은 더욱 세게 나타난다. 이런 원리에 따라 조선 수군의 무기는 최대로 날아가기만 하여도 왜선에 타격을 줄 정도로 그 위력은 컸다.

지자총통

지자총통
지자총통의 무게는 92kg이고, 길이는 89cm이며, 구경은 96mm이다. 여기에 장전하여 쏘는 장군전은 길이가 177~194cm이고, 지름은 92mm이며, 무게는 12.5kg(20근 8냥)이다. 철환은 겉에 납을 입혀서 지름이 61mm이며, 무게는 4.8kg이다. 또 여기에 조란환이나 중연자를 여러 개 넣어서 쏠 수도 있는데, 이는 천자총통과 마찬가지로 산탄포(霰彈砲)의 성격을 뛴 것임을 알게 해준다.

현자총통

현자총통
현자총통은 대형 총통 가운데 세 번째로 큰 무기이다. 사정거리는 차대전(次大箭)을 넣고 쏘면 800보(1,010m)이며 은장차중전(隱藏次中箭)을 넣어 쏘면 1,500보(1,894m)이다. 그리고 조란환은 100개를, 소연자(小鉛子, 작은 납탄알)는 30개를 넣고 쏠 수 있다.
현자총통은 길이가 79~95.5cm이고, 구경은 56~73mm이며, 무게는 75~85kg이었다. 이 총통에 넣어 쏘는 차대전은 길이가 154cm, 지름이 68mm, 무게가 5.0kg이며, 철환은 지름이 3.58mm, 무게가 648.8g이다. 현자총통에도 조란환이나 소연자를 넣고 쏘았는데, 이 역시 산탄포의 특성을 띠었다는 의미이다.

황자총통

황자총통
황자총통도 천자총통과 마찬가지로 1593년 이후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천자총통이나 황자총통이 크게 활용되지 않은 이유는 천자총통이 매우 무거워 운용하기가 불편하였고, 황자총통은 상대적으로 너무 작고 그 위력이 대단치 않아 큰 역할을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황자총통은 별황자총통으로 개량되었다. 아직까지 해전에서 황자총통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규모가 작아 해전에서 사용했을 때 살상 효과가 적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황자총통을 개량하여 만든 별황자총통은 총신의 중간에 포를 걸 수 있는 포이(砲耳)가 있고, 총통의 뒤쪽에 있는 약통 뒤에 손잡이 모병(冒炳)이 있어 포를 상 하 좌 우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별황자총통

별황자총통
별황자총통은 피사체로 조란환 40개를 넣고 쏘면 사정거리는 1000보(1,262m)였다. 이것을 피령(가죽으로 만든 날개)대신 차대전 크기의 쇠 날개를 단 철령목전(鐵翎木箭)을 장전하여 시험발사를 하였는데, 사정거리는 600m 정도였다. 지금까지 대형 총통을 중심으로 알아보았다. 이들 대형 총통 가운데서 별황자총통은 삼각발사대가 별도로 있으며, 그 밖에는 모두 동차(童車)를 발사대로 삼았다.

승자총통류

승자총통류
승자총통은 철환을 넣고 쏘았는데, 피령목전(皮翎木箭)을 장전하여 발사할 때도 있다. 다만 승자총통은 격목을 쓰지 않고 토격만을 사용하였던 것이 다른 소형 총통과 차이점이다. 승자총통은 철환을 한 번에 15개씩 넣고 쏘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선조 16년(1583)에 주조된 승자총통은 중간 탄환을 8개, 작은 탄환을 10개씩 넣고 쏘게 되어 있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자총통을 약간 크게 만들었기 때문에 15개씩 장전할 수 있었다. 이때 1회에 발사되는 화약의 양은 선조 8년(1575)에 주조된 것을 포함하여 7돈(23.8g) 정도라고 한다. 승자총통보다 구경이 조금 작은 것을 차승자총통이라 한다. 이 총통은 보물 855호로 지정되어 현재 서울대학교박물관에 1점이 소장되어 있다.

별승자총통류

별승자총통류
별승자총통은 승자총통을 변형시켜 구경을 작게 하고 총부리를 특별히 길게 하여 관통력과 명중률을 높인 것이다. 그런데 이 별승자총통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화포식언해》,《신기비결》,《화기도감의궤》등 어디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다만 유물에 새겨진 문구를 통하여 그 제원을 짐작할 뿐이다. 별승자총통은 재질이 청동인데, 전체의 평균길이는 75.82cm이고, 구경은 16mm이다. 약통의 길이는 15.44cm, 손잡이의 길이는 10.66cm, 무게는 3.5kg이며, 죽절의수는 대체로 8개이다.

완구류

중완구
임진왜란 때에는 곡사포曲射砲도 있었다. 대표적인 곡사포로 완구豌口가 있다. 이것은 구경에 비하여 부리[?]가 짧다. 완구라는 명칭은 그 모양이 사발접시완,豌와 비슷하다하여 붙인 것이다. 세종 때는 총통완구銃筒碗口라 하여 한 가지뿐이었으나, 조선 중기에 들어오면서 대완구 중완구 소완구 소소완구의 4종으로 발전되었다.
임진왜란 때 완구를 전선에 탑재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하는 기록이 있다. 바로 선조 26년(1593) 4월 웅포해전에서 충무공은 왜군이 주둔하고 있던 해안진지를 진천뢰震天雷로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진천뢰는 완구가 아니면 발사할 수 없는 폭탄이므로, 결국 완구가 함재화기로 운용되었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요즘 함정에서는 사격술 운용상 곡사포로 쏘기가 어렵기 때문에 평사포로 쏘고 있다. 이와 비교해 보면 임진왜란 당시 곡사포인 완구를 전선에 싣고 운용하였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탄석

탄석
대완구로 74근짜리 단석團石을 발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둘레 335.3mm의 원형 돌단석) 44.4kg짜리를 총통완구에 장전하여 발사한 것과 같은데, 이때 대완구의 총무게는 121.8kg(윗부분 104근, 아랫부분 99근에 이르렀다. 중완구의 무게가 20.4kg인 것으로 미루어, 단석의 지름은 220~260mm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보물 859호인 이 중완구가 바다에서 인양되었다. 그 지역이 당포해전이 벌어졌던 지역이었는데, 이로써 중완구는 전선에 탑재하여 해전에서 직접 운용했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소완구는 단석의 무게가 6.64kg인데, 이로 보아 크기는 중완구의 3분의 1정도 된다. 소완구보다 더 작은 소소완구라는 것도 있다. 현존하는 유물은 없으나, 너무 작아 발사할 때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나무자루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피사체로 단석을 쓰지 않고 자연석인 수마석水磨石을 사용한다. 대형 완구는 동차와 같은 별도의 발사대에 올려 놓고 단석이나 진천뢰를 포구에 넣어서 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