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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사후의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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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사후의 인식

오늘날 우리는 이순신을 훌륭한 조상으로 숭앙하면서 그분의 숭고한 정신을 본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일부 시각이지만 이순신의 행적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오늘날 국민들이 이순신을 존경하게 된 데에는 지난 시기 이순신에 대한 지나친 성웅화 정책의 추진과 그 결과로서 그의 업적을 과장하였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여기서는 일부 부정적인 시각에 대한 답변에의 근거자료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이순신에 대한 보편적인 평가를 하고자 한다. 즉 이순신이 순국할 당대로부터 후대의 인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세계 위인들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비교해 보고자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충무공에 대한 일부의 잘못된 평가를 바로잡고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당시 양력 12월 16일) 동틀 무렵에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장렬히 순국하였다. 이순신은 순국하는 순간에도 전투를 독려하면서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하여 대다수 부하 장졸들은 이순신의 죽음을 모른 채 용전분투하여 적선 200여 척을 격침시킨 대승첩을 거두었다.

노량해전이 끝난 후, 이순신의 순국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였다. 가족, 친지들의 슬픔은 말할 것도 없고, 부하 장졸들과 많은 백성들이 통곡하였다. 심지어 명나라 군사들마저도 식음을 폐하고 애도를 표했다. 당시 연합작전을 수행했던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은 선상에서 세 번이나 엎어지면서 슬퍼하기도 했다. 이순신의 영구가 고금도에서 아산으로 향할 때, 수십 리 길을 백성들이 뒤따르면서 통곡했다. 이순신의 막하인물 중 김택남(金澤南)은 상복을 입고 부모의 거상을 치르듯이 삼년상의 예를 다했고, 서희서(徐希恕)는 세상일에 뜻을 잃고 관직생활을 포기한 채 은둔하기도 했다.

이순신의 전사소식을 보고받은 선조는 그해 12월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고 동시에 우의정을 증직하였다. 그리고 1604년에는 좌의정으로 증직하면서 선무일등공신에 봉하였다.

이순신을 존경하던 당대의 학자들은 글을 지어 그의 명복을 빌기도 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많은 시나 글이 있지만, 그 중 가장 감명을 주는 글은 퇴우정 박승종(退憂亭朴承宗:1562~1623)의 〈충민사기(忠愍祠記)〉에 씌어진 문구를 들 수 있다. 이 글 속에 있는 가장 중요한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아! 공으로 하여금 만일 그 날에 죽지 않게 했다면 일개 공신에 지날 것이 없었는데, 이제 마침내 그 충성을 선양하고 절개를 표창함이 천지에 찬란하니 비록 죽었어도 오히려 살았도다.

이 구절은 이순신이 과연 죽을 시기에 죽을 곳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 죽음이 마치 살았을 때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죽지만 사람이란 죽는 때와 장소와 방법에 따라 그의 일평생이 마지막 매듭을 짓고, 거기서 한꺼번에 평가를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영웅들은 죽음에 대하여 비장한 결의를 표명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신라시대 심나 장군의 아들 소나는 “대장부는 진실로 마땅히 나랏일에 죽을 것이요, 어찌 침상 위에 누워 아내가 보는 곳에서 죽을까 보냐!”라고 했듯이 이러한 민족정기는 이순신에게 이르러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박승종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성을 버리고 군사를 패한 무리들은 몸이 그대로 성하여 제방 창문 아래서 늙어 죽는데, 이순신의 충렬은 마침내 몸을 버림에까지 이르렀으니 하늘의 보답이 어찌 이리 공평치 못한고. 그러나 구차스레 제 목숨 보존한 자들은 저 나뭇잎 위에 붙은 먼지와 다를 것이 없거니와 이것으로써 저것에 비긴다면 하늘의 은총이 또한 풍족하다고도 할 것이다.

이 말은 이순신의 죽음을 슬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찬한 것이요, 평안히 죽는 졸장부들과의 비교인 것이다.

그는 이순신보다 17살 아래로서 광해군 때에 영의정을 지낸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인조가 반정을 하자 자살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가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서 평한 것만은 명문으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계의 문인이며 이순신보다 14살 아래였던 영의정 추탄 오윤겸(椎灘 吳允謙, 忠貞公)의 이순신 제문(祭文)에는, “황천에서 다시 일으켜 볼 수 없음을 생각하고 백 명을 대신 바치고도 물려올 수 없음을 안타까이 여깁니다.”라고 한 구절이 있다. 가히 충무공에 대한 사모의 정이 극에 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문구라 할 것이다.

동시대인들 중 이순신의 후견인으로서 큰 활동을 했던 서애 유성룡은 다음과 같이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이순신은 백 번 싸운 장군으로서 한 손으로 친히 무너지는 하늘을 붙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재질을 가지고도 운수가 없어 백 가지 재능을 한 가지도 풀어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당시 조정대신들 중 유성룡과 더불어 수군 전략에 대하여 식견이 높았던 백사 이항복은 그가 지은 〈전라좌수영대첩비문〉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이순신의 화평하고 어진 덕과 과단성 있게 일을 처리하는 재능, 그리고 상과 벌을 곧바로 주는 용기 같은 것은, 만일 다른 사람이 이런 정도의 분이라면 백세에 이름을 날릴 사람이라 하겠지만 이순신에게 있어서는 그저 당연히 해야 할 하찮은 일로 여겼을 뿐 공명을 바라지 않았던 그런 사람이었다.

이순신이 순국할 당시 좌의정이었던 이덕형은 선조임금에게 이순신의 포장(襃章)을 요청하면서 다음과 같이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순신의 사람됨을 신이 직접 확인해 본 적이 없었고 한 차례 서신을 통한 적 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전일에 원균이 그의 처사가 옳지 못하다고 한 말만 듣고, 그는 재간은 있어도 진실성과 용감성은 남보다 못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신이 본도에 들어가 해변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니 모두가 그를 칭찬하며 한없이 아끼고 추대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그가 금년 4월에 고금도로 들어갔는데, 모든 조치를 매우 잘하였으므로 겨우 3~4개월이 지나자 민가와 군량의 수효가 지난해 한산도에 있을 때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제서야 그의 재능이 남보다 뛰어난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유제독이 힘껏 싸우는데 뜻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뒤에는 국가의 대사를 전적으로 수병에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주사에 자주 사람을 보내어 이순신으로 하여금 기밀의 일을 주선하게 하였더니, 그는 성의를 다하여 나라에 몸바칠 것을 죽음으로써 맹세하였고, 영위하고 계획한 일들이 모두가 볼 만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은 나름대로 생각하기를 ‘국가가 주사의 일에 있어서 만은 훌륭한 주장을 얻어서 우려할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가 전사하였으니 앞으로 주사의 일을 책임지워 조치하게 하는데 있어 그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참으로 애통합니다. 첩보가 있던 날 군량을 운반하던 인부들이 이순신의 전사소식을 듣고서 무지한 노약자라 할지라도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처럼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오산 차천로(五山 車天輅 : 1556~1615)는 그 당시 문장의 대가로 이름이 높던 인물로서 임진왜란 때에는 명나라 사신들과 문장을 서로 교환하는 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더욱이 오산은 이항복과 같은 나이로서 충무공보다 11년 후배였는데, 충무공이 순국한 뒤에 많은 시인들이 지은 애도시(哀悼詩) 중에서도 가장 애절한 정을 담은 시의 주인공이 바로 그였다. 그는 충무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이순신은 진실로 대적이 없는 참 장군이요, 다른 이들은 겨우 몽매한 것이나 면한 정도다.

한편 택당 이식(李植:1584~1642)은 충무공과 같은 덕수 이씨로서 특히 충무공의 시장(諡狀)을 지은이다. 시장이란 시호를 내려달라고 임금에게 청하기 위해 그의 전기를 적고 이어서 그의 인격을 평론하여 쓴 글이다. 이식은 시장에서 다음과 같이 충무공을 평가하였다.

이순신은 곧은 절개를 지켜 우뚝하니 벽처럼 선 사람이었다. 이순신은 몸을 꼿꼿이 하고 간 사람이며, 전쟁을 당하여서도 뜻이 조용하여 언제나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순신은 온 군대가 한 마음이 되어 감히 그의 명령을 어기는 사람이 없던 인물이었다. 이순신은 비록 역사상에 명장으로 백 년에 한두 사람밖에 나오지 않는 위인이라 할지라도 이순신보다 더 훌륭한 분이 있을 수 없다.

현충사 사진

▲ 현충사

지금까지 전해오는 그 어떤 제문들보다도 충무공의 죽음을 가장 옳게 평가한 글은 숙종 의 〈현충사 제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암 송시열 초상화

▲ 우암 송시열 초상화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 이 분에게서 처음 보네!

이 한마디야말로 충무공의 죽음에 대한 가치를 단적으로 표현한 글이라 하겠다.

한편 조선시대 17대 임금인 효종은 우암 송시열이 지은 충무공의〈노량묘비문〉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심경을 토로하였다.

아침에 이순신의 비문(碑文)을 보았는데,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殉節)한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우리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위당 정인보 사진

▲ 위당 정인보

또한 한말의 민족학자 위당 정인보는 다음과 같이 충무공을 평하였다.

이순신은 그 몸이 그대로 국가요, 그 마음이 그대로 민족이니 한갓 보천욕일(補天浴日)로써 위대할 바가 아니다.

이상과 같이 충무공이 순국한 당대부터 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충무공의 행적과 인품, 그리고 능력에 대하여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우리가 충무공을 성웅시하고 그를 존경하는 것은 현대에 이르러 갑작스런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거쳐 면면히 이어져 온 역사적 시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충무공에 대한 외국인들의 시각도 나라별로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먼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과 함께 연합작전을 수행했던 명나라 장수 용애(龍崖) 진린(陳璘)이 선조에게 올린 글 가운데 충무공을 평한 한 구절은 지금껏 충무공 예찬의 대표적인 문구가 되고 있다.


진린 사진

▲ 진린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의 재주〔經天緯地之才〕와 나라를 바로잡은 보천욕일의 공로가 있는〔補天浴日之功〕사람이다.

여기에 적힌 ‘경천위지(經天緯地)’란 것은 하늘을 날(經)로 하고 땅을 씨(緯)로 하여 종횡하는 재주를 가졌다는 뜻이요, ‘보천욕일(補天浴日)’이란 것은 옛날 중국 설화 가운데 여와씨가 오색돌을 갈아서 구멍 뚫린 하늘을 메웠다고 하여 ‘보천’이란 문자가 생겼고, 희화란 여신이 해 열 개를 낳아 감천에 목욕을 시켜 환하게 했다고 하여 ‘욕일’이란 문자가 생겼다는 것인데 바로 그 문자로서 충무공의 공적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내원했던 명나라 장수들은 충무공을 매우 존경하고 따랐는데,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당시 명나라 육군 장수 중에도 충무공을 높게 평가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당시 명나라 장수 군문 형개(邢玠)는 충무공의 전사소식을 듣고는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애통해 했다.

이순신은 마음을 다해 왜적을 토벌하다가 끝내 전사하였으니, 저는 너무도 애통하여 사람을 시켜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국왕께서도 사람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소서. 또 그 아들을 기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순신과 같은 사람은 얻기가 쉽지 않은데 마침내 이렇게 되었으니 더욱 애통합니다.

또한 명나라 부총병 조여매는 선조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순신은 충신입니다. 이러한 인물이 십여 명만 있다면 왜적에 대해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또한 당시 명나라 육군의 대장인 제독 마귀(麻貴)는 선조로부터 울산성 전투에서의 활약에 대해 칭송을 듣자 그는 오히려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순신이 혈전을 벌이다가 죽었는데, 저는 그를 직접 만나보지는 못하였으나 탄복할 만합니다. 그의 자손에게 포상하여 그 충렬을 정표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한편 사로병진작전에 따라 예교성을 육지에서 공격했던 명나라 육군장수 유정(劉綎)도 선조를 배알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순신 같은 자들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저는 조금도 자랑 할만한 공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당시 명나라 장수들은 충무공에 대하여 한결같이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면 서방세계의 사람들은 충무공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먼저 영국의 해전사 전문가이면서 당시 해군 중장이었던 발라드는 충무공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빌라드

▲ 빌라드

그의 이름은 서구 역사가들에게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공적으로 보아서 위대한 해상지휘관들 중에서도 능히 맨 앞줄을 차지할 만한 이순신 제독을 낳게 한 것은 신의 섭리였다. 이순신 제독은 광범위하고 정확한 전략판단과 해군 전술가로서의 특출한 기술을 갖고 있었으며, 탁월한 지휘통솔력과 전쟁의 기본정신인 그칠 줄 모르는 공격정신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가 지휘한 모든 전투에 있어 그는 언제나 승리를 끝까지 추구하였으며, 그 반면에 그 용감한 공격이 결코 맹목적인 모험은 아니었다는 점은, 넬슨 제독이 기회가 있는 대로 적을 공격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다가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순신 제독이 넬슨 제독보다 나은 점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계 발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어서 한산도해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이 해전으로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려던 야욕은 급속히 끝을 맺었다. 이것은 위대한 조선의 제독이 세운 빛나는 전공 때문이었다. 불과 6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그는 전세계 해전사상 일찍이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연전연승의 전공을 세웠다. 그는 적의 전투함대를 파멸시키고, 적의 병참선을 차단하고 적의 수송선단을 소탕하여 육전에서 승리를 하고 있는 적 육군의 태세를 위태롭게 만들었으며, 적의 야심에 찬 계획을 완전히 궤멸시켰다. 넬슨 블레이크 또는 장 보르라 할지라도 가끔 잔혹한 외국의 압제를 받았던 아주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외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지휘관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이순신의 명성이 그의 조국 이외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유감된 일이다.

같은 시대 사람인 사토 데쓰타로오(佐藤銕太郞 : 1866~1942)는 대좌시절인 1908년에 해군대학에서 강의하였는데, 그때 그의 저서 《제국국방사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예부터 장군으로서 기정분합의 묘법을 다한 자는 한둘에 지나지 않는다. 나폴레옹이 ‘전으로서 그 분을 쳤다.’고 하는 것도 이 뜻에 틀림없다. 그런데 해군 장군으로서 이를 살피면 먼저 동양에 있어서는 한국의 장수 이순신, 서양에서는 영국의 장수 넬슨을 들지 않으면 안된다. 이순신은 실로 개세(蓋世)의 해장(海將)이다. 불행히도 생을 조선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용명도 지명도 서양에 전하지 않고 있지만, 불완전하긴 해도 임진왜란에 관한 문헌을 보면 실로 훌륭한 해군 장군이다. 서양에 있어서 이에 필적할 자를 찾는다면 네덜란드의 장수 드 롸이테르(Michiel de Ruyter : 1607~1678) 이상이라야 한다. 넬슨과 같은 사람은 그 인격에 있어서 도저히 어깨를 견줄 수 없다. 이 이순신 장군은 장갑함을 창조한 사람이며, 300년 이전에 이미 훌륭한 해군전술로써 싸운 전쟁 지휘관이었다.

한편 일본의 작가 시바 료타로오(司馬遼太郞)가 지은 《언덕 위의 구름》에 보면, ‘함대가 진해만을 출항할 적에 어뢰정의 어느 함장이 “충무공 이순신의 영령에 빕니다”라고 했다’는 말을 인용하여 적었다.

또한 당시 해군 소령이었던 가와다 이사오(川田功)라는 장교는 뒷날에 해군 전략가로 활동하였는데, 그는 《포탄 잠재우기》(1911년 발간)라는 책에서 이렇게 꼬집어 말했다.

과연 우리는 이순신의 영령에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달라고 빌었다. 도고가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그 발가락 한 개에도 못 따라간다. 이순신에게 넬슨과 같은 거국적인 지원과 그만큼의 풍부한 무기와 함선을 주었다면, 우리 일본은 하루아침에 점령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단히 실례인줄 알지만, 한국인들은 이순신 장군을 성웅이라고 떠받들기만 할 뿐, 그 분이 진정으로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하는 것은 우리 일본인보다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작가 시바 료타로오는 충무공을 ‘세계에서 가장 으뜸가는 바다의 영웅’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순신은 풍신수길의 군대가 조선에 침입하였을 적에 해전에서 몽땅 무찔러 깨뜨렸다는 조선의 이름난 장수이다. 이순신은 당시의 조선 관리들 가운데서 유일하리만큼 청렴한 인물로서 그 지휘통솔력에서나 전술능력에 있어서도, 충성심과 용기에 있어서도, 실제로 기적과도 같은 이상적인 군인이었다. 영국의 넬슨 이전에 있어서의 이름난 장수이기도 하거니와 세계 역사상 이순신 만한 사람이 없으며, 이 인물의 존재는 조선에 있어서까지도 잊혀지지 않겠지만 도리어 일본사람의 편에서 그에게 존경심이 계승되어 명치유신 기간에 해군이 창설되기까지 하였으니 그 업적과 전술이 연구되어져야 한다.”

이와 같이 현대에 이르러 일본인들 사이에 충무공에 대한 높은 평가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컬한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일본인의 충무공에 대한 평가에 관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례 한 가지만 더 소개해 본다.

1905년 5월 27일에 일본 함대의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은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대마도 북방 해상에서 조우하여 물리쳤다. 이 해전에서의 승첩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이 해전의 결과 도고 제독은 일본의 영웅으로 칭송되었다. 도고는 이 해전의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에서 하객으로부터 자신을 넬슨에 필적할 군신이라는 축사를 받았는데,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넬슨

▲ 넬슨

넬슨이란 사람은 그 정도의 인물은 아니다. 군신의 이름으로 불리울 참된 제독이 있다면, 그것은 이순신 만한 사람뿐인 것이다. 이순신에 비한다면 내 자신은 하사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다른 자리에서 “조선의 이순신은 나의 스승이다”라고 피력하면서 충무공에 대한 존경심을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


제갈량 사진

▲ 제갈량

어떤 인물을 연구함에 있어서 동서양 다른 민족의 역사상에 나타난 인물들과 더불어 비교 연구해 본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흥미에서가 아니라 보다 정확한 평가를 하기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방법이다.

충무공이 순국 후 많은 사가들은 충무공을 중국의 제갈량(諸葛亮)과 비교하여 논하였다. 이를테면 《선조실록》(31년 11월 27일)에는 사관이 논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죽은 순신(舜臣)이 산 왜놈들을 격파하였다”고 평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그 당시까지만 해도 동양에서는 가장 위대하다고 알려진 제갈량의 고사를 들고 있다. 그 고사의 근원은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仲達)을 패주시켰다”라고 한 말에서 따온 것이다.

김육(金堉 : 1590-1658)은 충무공의 〈신도비문〉에서 “이순신도 제갈량과 같이 나라를 위해 죽었다”라고 하여 역시 제갈량과 비교하였고, 김시양(金時讓: 1581-1658)은 “노량에서 이순신 장군은 임종 앞에서 기를 휘두르며, 북을 치라고 분부했다.

그의 아들이 그의 명령대로 실행하였으므로, 산 중달을 패주케 한 제갈량의 주책을 쓴 것이며, 이는 가장 범상치 않은 일이다”라며 역시 제갈량과 비교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충무공을 제갈량과 비교하는 핵심적인 행적은 적과의 전투에 있어서 연전연승을 했다는 것과 마지막 전투에서 자신의 죽음을 적이 모르게 함으로써 적을 무찌르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충무공의 유언이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라고 표현되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충무공은 자신의 죽음을 부하들에게 알리지 않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적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항간에는 충무공의 유언을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라고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충무공의 위대한 유언을 폄훼하는 문구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표현도 일리는 있지만, 지극히 상식적인 유언을 충무공이 남겼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리더십 부문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충무공이 죽음을 감춘 것은 적보다 앞서 부하들이 알지 못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어쨌든 충무공과 제갈량은 항상 적과 싸워서 이김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그것은 마지막 전투에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은 충무공이 마지막에 자신의 죽음을 감춘 것이 제갈량의 계책을 응용한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충무공을 제갈량과 비교되는 훌륭한 인물로 인식한 것이다. 다만 제갈량을 상위에 두고 그 다음에 충무공을 이에 비견되는 인물로 평했던 것이다.

충무공과 제갈량은 공교롭게도 54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는 것과, 시호가 ‘충무’라는 점, 그리고 조국을 위해 충성을 다하다가 싸움터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후세 사람들이 각각 자기 나라 인물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지만, 엄밀하게 비교해 보면, 그 생애의 가치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제갈량(諸葛亮 : 181~234)은 중국 고대 촉한(蜀漢) 때의 사람으로 흔히 중국 역사상 대표적인 위인이라고까지 일컫는 분이다. 그는 27세에 소열황제가 세 번이나 방문하여 총애를 입기 시작했지만, 충무공은 유성룡의 말대로 조정에서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어 과거에 오르고도 15년 간이나 변방이나 미관말직을 전전했다는 데에 차이가 있다.

또한 제갈량은 조정에 등용된 이후 박해나 모략을 받은 바 없이 군사전략가로서 또는 재상으로서 군사와 정치를 한손에 쥐고 당당한 일생을 보냈지만, 충무공은 모략과 박해를 받으면서 파직과 백의종군으로 얼룩진 고난의 생애를 보냈다.

조선시대는 중국의 왕조를 ‘천자국’ 또는 ‘상국’으로 떠받드는 사대사상이 지배하는 사회였기에 중국 역사상 훌륭한 인물들에 대해 조선에서는 우리 조상보다도 상위에 두고 존경과 찬사를 보내왔다. 그러기에 조선시대의 많은 학자와 사상가들은 제갈량을 가장 훌륭한 인물로 치부하면서 우리 역사상의 위인들을 이에 비교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충무공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제갈량에 비교되는 정도에 그쳤던 것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순조 때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던 홍석주(洪奭周 : 1774~1842)는 이러한 관념에서 벗어나 충무공에 대한 인물평을 새롭게 하였다. 그는 충무공이 전몰한 지 234년이 지난 1832년에 남해 관음포에 세운 유허비에 “제갈량은 병으로 죽었는데 이순신은 전쟁에서 죽었고, 또 제갈량이 죽자 촉한의 왕실은 위태로워졌는데 이순신은 그의 죽음으로 나라의 명맥을 영원히 살려놓았다.”고 하여 그 가치가 서로 같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이를테면 이순신을 제갈량에 비교한 것이 아니라 제갈량을 이순신에 비교하면서 제갈량은 이순신에 미치지 못하는 인물임을 지적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상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제갈량에 대하여는 온갖 찬사와 존경을 표하면서 충무공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던 것을 상기해 볼 때, 참으로 개탄할 일이라 할 것이다.

제갈량이 운명하기 전에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 일이 있었고, 우리의 충무공도 순국 직전에 별이 떨어진 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제갈량의 별 얘기는 자주 거론하면서 충무공의 별 얘기는 별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제갈량이 두 차례에 걸쳐 써낸 출사표(出師表)는 명문이라면서 찬사를 보내면서도 충무공이 쓴 훌륭한 시나 유려한 문체의 장계?난중일기 등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요컨대 충무공은 제갈량과는 분명히 다르게 평가해야 한다. 충무공은 제갈량이 누렸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세를 누리지도 않았고, 조정으로부터 아낌없는 지원을 받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국의 일념으로 끊임없는 노력을 다하여 국난을 극복하였고, 불우한 처지의 백성들을 보살핀 분이다. 따라서 이제는 충무공을 제갈량에 비할 것이 아니라 제갈량을 충무공에 비교하여야 할 것이다.


넬슨 사진

▲ 넬슨

충무공은 동서양 해전사가들로부터 해전의 영웅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의 해전 영웅으로 손꼽히는 영국의 넬슨과 자주 비교가 되곤 한다. 그러면 넬슨은 어떤 인물이며, 충무공과는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영국 역사상 넬슨(Nelson, Horatio : 1758~1804)은 영국 해군의 군신으로 추앙받는 인물로서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넬슨이 유명한 이유는 그가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영국이 해상지배권을 획득하는 데 기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의 전 생애를 기술할 필요는 없고, 다만 그가 치른 해전을 소개하면서 그의 행적을 간략하게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1777년(19세)에 해군 장교로 근무한 이래 1793년에 64문의 함포가 설치된 전함 ‘아가메논’의 함장이 되었고, 1794년에 코르시카 섬에서 프랑스 함대와 전투를 벌여 120문의 함포가 설치된 프랑스의 거함을 포획했다. 이어 ‘빈센트 곶’ 해전에서 넬슨은 자기가 탑승한 군함 단독으로 7척으로 편성된 에스파냐의 전대(戰隊)에 돌입하여 2척의 적 군함을 포획함으로써 이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이 해전에서의 승리로 넬슨은 선임 소장으로 승진했다. 이어서 1798년 8월초에 그는 전함 14척으로 나일강구에서 프랑스 함대 13척을 맞아 프랑스 함대가 진형을 갖추기 전에 공격을 개시하여 밤새도록 교전한 끝에 프랑스 함대를 전멸시켰다.

이 해전이 끝난 후 그는 함대사령관 파커(Parker, Hyde)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1801년 4월초의 ‘코펜하겐’ 해전에서 그는 지휘관인 파커의 소극적인 지휘를 따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적 함대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해전에서의 승리로 그는 영국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마침내 그 유명한 ‘트라팔가’ 해전을 치렀다. 트라팔가 해전은 1805년 10월에 있었는데, 프랑스의 빌뇌브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함대 33척과 넬슨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 27척이 벌인 해전이었다. 이 해전에서 넬슨은 단 한 척의 전함 손실도 없이 프랑스?에스파냐 연합함대를 물리침으로써 나폴레옹의 영국 상륙작전을 분쇄하였고, 이후 영국 해군이 1백여 년 간 바다를 제패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 해전이 끝날 무렵, 넬슨은 적병의 저격을 받아 전사하였는데, 그는 운명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겼다.

자, 나는 만족한다. 내 임무를 다하게 해 준 신에게 감사한다.

(Now I am satisfied. Thank God, I have done my duty.)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넬슨은 영국 해군의 역사상 영웅으로 칭호를 받는 데 전혀 손색이 없는 업적을 남겼다. 특히 그가 여러 차례 해전에서 보여준 뛰어난 활약상과 전투가 끝날 무렵 전사한 점에서는 충무공과 유사한 점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넬슨과 충무공은 많은 점에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넬슨은 그가 전투에 전념할 수 있도록 국가에서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를테면 국가에서 건조해 준 우수한 전함과 잘 훈련된 해군병사들을 거느리고 본토에 대한 걱정 없이 바다에 나가 싸우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충무공의 경우에는 모병에서부터 훈련까지 자신의 책임 하에 수군요원을 확보하여 조련해야만 했고, 전선건조?대포주조?화약 및 군량 조달 등을 조정의 지원 없이 혼자 힘으로 해결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은 일본인 가와다 이사오의 적절한 지적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넬슨은 자신이 운명하는 순간 ‘자신이 할 바를 다했다’고 만족한 심정을 유언으로 남기면서 숨을 거두었다. 반면에 충무공은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군사들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라는 유언을 남기고는 순국하였다. 넬슨의 유언은 자신의 죽음이 군인으로서 죽을 곳에서 죽기 때문에 만족감을 피력한 것으로 훌륭한 유언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충무공은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기보다는 당장 적을 어떻게 쳐부술 것인가에 전념하여 죽는 순간에도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원했던 것이다. 이 얼마나 거룩한 유언인가.

한편 넬슨은 군인으로서는 훌륭했지만 인간으로서는 부도덕한 행위를 저질렀다. 그는 나폴리의 영국 공사 해밀턴 경의 부인인 엠마와 간통을 하였고, 그녀의 물질적 도움을 받기도 했다. 넬슨의 간통 사건은 영국 조정에서 비난거리였지만, 영국조정에서는 국가이익을 위하여 그의 부도덕한 사생활을 묵인하고 자국의 함대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해전을 수행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그러나 충무공의 경우 도덕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다. 오히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단호히 질책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제1장에서 살펴본 그의 전라좌수사가 되기까지의 행적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조정에서는 자의적 판단에 의해 그를 세 가지의 죄명을 부여하여 감옥살이를 시켰고, 두 차례나 백의종군과 보직해임을 시키기도 했다. 조정에서 지원을 잘해줘도 전투에서 승리를 기약하기 어려운데, 지원은커녕 온갖 고난과 시련을 겪도록 하면서 적을 무찔러 줄 것만 기대했던 것이다. 충무공은 조정의 아무런 지원도 없이 박해를 받으면서도 위대한 불패의 신화를 창조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넬슨과 충무공은 해전결과만 놓고 보면 둘 다 훌륭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 과정과 도덕성 면에서 볼 때 분명히 커다란 차이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넬슨의 업적은 결코 충무공에 비교될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넬슨 사진

▲ 넬슨

일본 역사상 가장 뛰어난 해군제독을 꼽는다면 단연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 1847~1934)를 지적할 것이다. 도고 제독은 러일전쟁 당시 ‘대마도’ 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물리침으로써 일약 일본의 영웅으로 추앙 받았다. 이 도고 제독과 충무공을 비교해 보자.

도고는 1866년에 지방〔藩〕해군에 입대한 후, 1870년에 신정부의 군함에 견습하면서 영국 해군사관학교에 6년 동안 유학하였다. 그 후 1903년에는 연합함대 사령관이 되어 청일전쟁 때에 황해 해전에도 참가하였다. 이어서 1905년 5월 27일~28일 이틀간에 걸쳐 벌어진 러시아 발틱 함대와의 이른바 대마도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도고가 국가적 운명이 걸린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국민적 영웅으로 추대된 점에서는 충무공의 경우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해전 당시의 상황과 전술적인 면을 검토해 볼 때 분명히 충무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도고가 영국에서 수입한 군함을 타고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맞이했을 때 로제스트 벤스키가 이끈 러시아의 발틱함대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에 처했었다. 그 당시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저지하기 위하여 미국과 협력하여 발틱함대가 극동지역으로 오는 동안 수웨즈 운하를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여 아프리카 남단을 우회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영국이 통치하는 항구에서 식수와 식량 지원을 못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발틱함대는 18,000해리나 되는 장거리 항해를 통해 지칠대로 지친 가운데 접전지역인 동해에 도착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발틱함대를 맞이한 도고함대는 매우 유리한 여건에서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비교해 볼 때 충무공의 경우는 도고와는 매우 다르다. 명량해전의 경우만 예를 들어 보아도 충분히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명량해전 당시 충무공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패배한 후 남은 전선 13척 뿐이었다. 지휘관인 충무공은 옥살이와 백의종군 등으로 불우한 환경에 처했다가 통제사가 된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상태였다. 조선수군 또한 칠천량 패전 후 사기가 급속도로 떨어진 가운데 전의를 상실한 상태에서 적을 맞이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처했던 상황이 충무공의 조선함대가 처했던 상황과 오히려 유사했던 점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적 전선은 남원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사기가 치솟은 상태에서 우리 전선의 10배 규모인 133척이나 명량 수로에 진입하였고,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충무공은 적을 물리쳤던 것이다. 따라서 유리한 위치에서 피로한 적을 무찌른 도고와는 분명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도고가 자신이 충무공에 미치지 못함을 인정한 배경에는 이러한 사례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도고가 충무공에 비교될 수 없는 점을 전술적인 측면에서도 찾을 수 있다. 도고가 발틱함대를 맞아 적용한 전술은 이른바 ‘T’자 또는 ‘정(丁)’자 전술이라고 부른다. 도고는 발틱함대가 종열진으로 기동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T’자 형태의 상단부와 같이 횡으로 기동하면서 적을 공격했는데, 이것은 종열진으로 포를 쏠 경우에는 맨 앞의 전함만 제대로 포를 쏠 수 있는 반면에 뒤에 따르는 전함들은 앞이 가로 막혀 포를 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다시 말해 도고함대는 횡으로 기동하면서 전 전함이 포를 발사하기에 용이하게 기동하였고, 적 전함들에 대하여 탄착점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반면에 발틱함대는 종열진을 형성한 가운데 해전을 치름으로써 포 발사가 어려웠던 것이다.

이러한 전술은 반드시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당시의 상황에서 매우 적절한 전술이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전술은 이미 임진왜란 당시에 충무공이 한산도해전 때에 적용했던 학익진 전술을 따랐다고 한다. 다시 말해 충무공이 이미 300여 년 전에 적용했던 전법을 그대로 답습했던 것이다. 그래서 도고가 ‘이순신은 나의 스승이다’라고 언급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따라서 도고와 충무공은 결코 동급 서열에 두고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이상에서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인물평과 함께 세계위인들과의 비교를 해 보았다. 이를 통해 우리가 확신 할 수 있는 것은 충무공은 ‘세계 최고의 영웅’으로, ‘국난극복의 일등공신’으로, 그리고 ‘개세의 해장’으로 불려지는 것이 매우 타당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가는 당연하다고 하더라도 임진왜란 당시의 적국이었던 일본과 자존심 강한 중국, 그리고 우리와 문화가 다르고 멀리 떨어진 영국인들마저 충무공에 대하여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는 것은 이를 충분히 입증하였다.

그런데 외국인들이 보는 시각은 해전에 편향된 측면이 많다. 즉 충무공의 군인으로서의 위대성만 논했지 그분의 인간적인 면과 공직자로서 발휘했던 업적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충무공은 단순히 해전에서만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것이 아니다. 당시 충무공은 관직생활을 하면서 정의와 책임으로 일관하였으며, 전쟁 중에도 민생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노력을 다했다는 점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랬기에 당시 많은 백성들이 통제사의 주위에 몰려들어 그가 어려울 때 도움을 주고 죽기를 각오하면서 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