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의 생애

  • 탄생부터 무과합격까지
  • 무관시작~정읍현감까지지
  • 임진왜란 시기의 활동
  • 이순신 사후의 인식
  • 이순신연보

임진왜란 시기의 활동

  • HOME
  • 충무공의 생애
  • 임진왜란 시기의 활동

임진왜란 직전의 활동

이순신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줄여서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것은 그의 나이 47세 되던 해인 1591년 2월 13일이었다. 전라좌수사는 정3품직으로 오늘날의 함대 사령관직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부임하게 된 것은 당시 조정대신이었던 류성룡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당시 사간원에서는 이순신이 정읍현감에서 6품계를 뛰어넘어 좌수사에 임명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는데, 선조 임금은 ‘이순신이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하면서 묵살하였다. 그만큼 이순신의 능력이 조정으로부터 높게 평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2개월 전에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게 된 것은 우리 민족으로서는 정말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시 말해 1년 2개월이라는 준비 기간이 주어졌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과 같은 뛰어난 인물을 전라좌수사에 천거한 류성룡의 인재식별 능력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국난극복의 한 단면이라 할 것이다.

전라좌수사는 휘하에 5개 수군진(방답, 사도, 녹도, 발포, 여도)을 직접 지휘하고, 5개 관(순천, 보성, 낙안, 광양, 흥양)을 관할했다. 그 중 발포진은 이순신이 약 10년 전인 1580년 9월부터 1582년 1월까지 만호로 근무한 적이 있는 곳이다. 당시 14관 12포를 관할하던 전라우수영과 8관 20포를 관할하던 경상우수영에 비해 절반 이하로 작은 규모였다.

전라좌수사가 근무하는 수영은 여수(당시는 순천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전라좌수영은 1479년(성종 10)에 설치되어 해남의 전라우수영과 함께 좌우수영체제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111년의 역사가 흐른 시점에서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전쟁에 대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남쪽 변방지역에서는 일본군이 침입할 것이라는 정보가 속속 들어오기 시작하여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순신은 우선 본영인 좌수영에 대한 방비태세를 점검하고 성을 견고하게 수축하는 한편 유사시 신호체계를 완비하기 위해 연대(煙臺)를 새롭게 건설하였다. 아울러 수중철쇄를 준비하여 해상에서 침입해오는 적을 대비한 방어태세도 완비하였다.

이러한 노력과 병행하여 이순신은 이전 시기 왜구들의 침입양상을 분석하면서 장차전에 대한 대비를 충실히 해 나갔다. 이를테면 이순신이 주안점을 둔 것은 일본군의 전술에 대비하여 조선 수군의 전술을 체계화·효율화시키는 작업이었다. 따라서 전술구사의 기본이 되는 전선과 무기체계의 정비에 각고의 노력을 경주해 나갔다.

판옥선을 정비하면서 함께 탑재할 각종 총통을 정비하였으며, 화약제조 기술자를 발굴하여 화약을 대량으로 제조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동시에 거북선이라는 신형 전선을 개발하여 전술을 보완하는 작업도 펼쳐나갔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개발한 것은 판옥선만으로 전투하기에 어려운 상황을 예상하여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예컨대 적선이 포구 깊숙이 정박해 있을 때 판옥선만으로 공격하기에는 포구언덕에서 총을 쏘는 적을 맞아 위험부담이 컸으므로 아군의 피해 없이 적선에 가까이 접근하여 화포를 집중 발사하기 위함에 있었다. 한편으로 해상에서 전투 시에는 돌격선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목적으로 건조된 것이다.

이순신이 전쟁에 대비하여 제반 준비를 착실히 수행해 나가고 있을 때 조정에서는 전쟁의 징후를 읽고 비변사를 중심으로 대책 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당대의 명장 신립장군이 제시한 유사시 일본군이 침입해 올 경우 바다보다는 육지에서 성을 쌓아 막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의견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일본 땅은 섬인 만큼 육전보다는 해전을 잘할 것으로 판단되므로 유사시 육지에 상륙시켜 성을 이용해 적을 막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라는 의미였다. 이러한 결정은 일본의 정세를 읽지 못한 채 한마디로 탁상(卓上)에서 공론(空論)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일본은 이전 시기 100여 년 간 지속되어 온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해 수많은 육전의 경험이 축적된 상태였다. 뛰어난 축성술과 함께 성을 공격하고 수비하는 전술이 크게 발전한 상태였다. 여기에다가 조총의 도입과 실전 활용은 그들의 육전 능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반면에 해전은 등선백병전(登船白兵戰)이라는 원시적인 왜구전술을 답습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실정에서 조정의 지시는 달리 표현한다면 일본군이 쳐들어 올 경우 해군이 필요 없으므로 해군병력을 육전에 활용하라는 의미와 다를 바 없었다. 이러한 결정은 공문으로 전국 연해 방어지역에 시달되어 이순신도 그해 7월에 이러한 지시공문을 접수하였다.

이순신은 이러한 지시가 잘못된 점을 조목조목 따지면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적을 막는 데는 해전이 제일이라 해군을 결코 폐할 수 없다’는 뜻을 개진하였다. 이순신은 당시 왜구들의 약탈로 일본 땅에 억류되어 있다가 탈출한 백성들로부터 일본의 상황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순신은 육전은 몰라도 해전의 경우 준비만 잘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본 것이다. 아울러 일본군이 육지로 상륙하게 되면 설사 전투에 승리하더라도 백성들의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고 인식한 것이다. 따라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바다에서 일망타진해야 한다는 것이 이순신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건의를 받은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의견이 일리가 있다는 판단을 하여 유사시 장수들의 재량에 맡기기로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이순신은 해전에 대한 전문 전략가이자 뛰어난 지휘관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바다가 얼마나 중요한지 해전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병역 근무자일 경우 어렵고 힘든 수군 근무를 기피하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때에 이순신은 국가를 방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은 해전이라고 보았고, 우리의 수군력을 제대로 갖추면 나라를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인식한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중요하고도 어려운 분야를 선구적으로 개척한 것이다. 이러한 이순신의 해전에 대한 인식은 그의 해전 승리의 정신적 근간이 되었다. 어쨌든 이순신은 부임한지 1년 2개월 동안 제반 전쟁준비를 착실히 함으로써 임진왜란을 맞아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의 활동

임진왜란 초기 조정은 제승방략제에 따라 수군운용책을 강구하여 시행하였다. 그런데 개전 초기 경상좌도 수군이 자멸하였고, 경상우수군도 패퇴하였다. 겨우 전력을 구비한 전라도 수군이 경상도에 부방(赴防)하는 방식으로 수군이 운용되었다. 특히 이순신이 이끈 전라좌수군이 주축이 되어 얼마 남지 않은 경상우수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의 해상 서진을 차단하였다. 조선 수군의 제1차 출전(1592. 5.4~5.10) 중에 벌어진 옥포·합포·적진포해전에서의 승리는 전라좌수군과 경상우수군이 연합한 결과이다.

이어서 제2차 출전(5.29~6.10) 중 4차례 해전의 3번째 당항포해전부터는 전라우수군도 참전함으로써 전라좌우도와 경상우도의 수군이 연합한 가운데 일본군의 해상 서진을 방어하였다. 이후 제3차 출전(7.6~7.10)인 한산도대첩과 제4차 출전(8.29~9.1)인 부산포해전을 거치는 동안 각도 수군은 유사시 출전하였다가 임무 종료 후 각자 소속 수영으로 복귀하는 형태로 이합집산을 되풀이하면서 일본군의 해상 서진을 차단하였다.

이러한 수군의 활약은 임진왜란 전황을 호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즉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육지에서의 관군은 패전소식만 전해왔다. 이때 조선 수군이 옥포해전에서 적선 40여 척을 분멸시켰다는 내용의 보고가 있자 선조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가자를 명했다. 이어 당포와 한산도 등에서 승첩한 장계를 받은 조정은 “상하가 뛸 듯이 기뻐하며 경하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조선 수군의 전공에 대해 높게 평가하였다. 특히 한산도대첩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이순신에게 정헌대부의 자계(資階)를 상으로 내리고 글을 내려 칭찬하였다.

이상과 같이 1592년 한 해에 있었던 여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것에 대해 선조와 조정의 신료들은 한 마음이 되어 높게 평가하였다. 이것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중심으로 효율적인 방어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즉 전라도의 관과 포에 소속된 모든 수군은 동원되어 경상우수군과 힘을 합쳐 전력의 집중을 기할 수 있었다. 아울러 육지와 같은 경장의 파견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수군 사정에 익숙한 수군절도사에 의한 지휘로 전투에 효율성을 기한 결과인 것이다. 여기서 조선 수군의 전선과 무기가 상대적으로 우세했던 것도 한 요인이었음은 물론이다.

어쨌든 이순신의 주도적 지휘로 조선 수군은 임진년 16차례의 해전에서 전승을 거두어 일본군의 서진을 막음으로써 북상했던 일본군의 해상보급 지원을 차단함으로써 전황을 조선에 유리하게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강화교섭기의 활동

이후 1593년 2월부터 3월초에 있었던 7차례에 걸친 웅포해전에서 상륙전을 구사하면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그해 4월 18일 일본군이 한성에서 철수한 이후 6월부터는 충청도 수군이 남하하여 합류하였다. 이때 조선 수군은 임진년의 경험과 일본군의 남하에 따른 전라도 방어를 위해 한산도에 전진기지를 설치하였다. 조선 수군이 한산도에 전진기지를 설치한 목적은 당시 일본군이 부산으로부터 거제까지 연이어 포진함으로써 이들을 막을 효과적인 방책을 강구한 결과였다. 이를테면 이순신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1593년 6월 현재 3도의 전선이 100여 척인데, 적선은 7~8백 척이 장문포·웅포·제포·안골포 등지로 옮겨 주둔하는 형국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적인 면에서 열세인 조선 수군이 전진하여 일본군을 공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삼도의 수군은 한산도에 진을 치고 주둔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결국 조선 수군은 충청도·전라도·경상도 수군이 한산도에 모여 첨방(添防)하는 형태로 일본군의 해상을 통한 서진을 막았다. 이해 8월부터는 삼도수군통제사 제도가 성립되어 초대 통제사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임명되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이후 삼도의 수군이 임시로 주둔하기 시작했던 한산도는 정유재란 시기에 통제사가 교체될 때까지 삼도 수군이 주둔하는 주기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한산도에 주둔하여 삼도수군을 잘 통솔하면서 견내량을 봉쇄하여 일본군의 해상 서진을 철저히 차단하였다. 아울러 2만여 명의 삼도수군을 유지하기 위해 둔전 경영, 염전 개간, 어로 행위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군량을 마련하였다. 동시에 수군 정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조정에 부단한 정책 건의를 하여 조선 수군의 처우를 개선하고 전투력을 제고시키는 노력을 기울였다. 와중에 1594년 3월 초에 있었던 제2차 당항포해전에서는 적선 30척을 분멸시키는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정유재란 시기의 활동

1594년 9월말~10월초에 있었던 장문포해전에서 조선 수군과 육군이 총력전을 펼쳐서 장문포왜성을 공격했지만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강화교섭이 절정에 달하면서 조선은 배제한 채 일본과 명나라와의 휴전회담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한 선조는 이순신이 일본군에 대한 공세를 늦추는 것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었다. 이순신으로서는 명군 지휘부의 대일본군 공격중지 명령과 대다수 본국으로 철수한 일본군이 쌓은 견고한 왜성을 대상으로 한 공격이 어려운 형편인 사실 때문에 한산도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선조로 하여금 이순신이 게으르고 방자하다는 인식을 갖게 하였다.

그러던 중 강화교섭이 1596년 9월에 결렬되었고, 일본군이 정유년 초에 재침을 해 왔다. 당시 일본군 지휘부는 고니시의 부하 요시라를 통해 일본군의 부산 침략은 가토 군 때문이라는 정보를 주었다. 다시 말해 1597년(정유년) 1월초에 부산 앞바다로 침략해오는 일본군을 조선 수군이 요격하면 더 이상 전쟁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솔깃한 정보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맹신하여 이순신으로 하여금 부산 앞바다로 진공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여러 가지 타당한 이유를 들어 진격을 하지 않았다. 가토 군이 부산에 상륙한 것은 이순신의 소극적인 대처 때문이었다고 인식한 선조는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하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정유년 2월 26일 한산도에서 파직된 이순신은 3월 4일 의금부에 투옥되었으며, 사형의 위기를 맞았으나 정탁, 유성룡 등 조정 대신들의 도움으로 풀려나 4월 1일부터 도원수 권율 휘하에 가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약 4개월간의 백의종군을 하면서 주로 군 지휘관들과 군사 관련 자문 역할을 하였으며, 둔전 경영과 전마관리도 병행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수군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7월 16일에 있었던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후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였다. 이순신은 8월 3일 진주에서 통제사 임명 교서를 받자마자 전라도로 서진하여 수군력을 정비하였다. 순천과 보성을 거치면서 모은 수백명의 장졸들과 군수물자를 8월 19일 회령포에서 배설이 이끌고 온 전선 12척에 탑재하여 이후부터 전선을 거느리고 본격적인 수군활동에 돌입하였다. 8월 26일에 부임한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가져온 1척의 전선을 합하여 모두 13척의 판옥선으로 이틀 후에 벌어진 어란포해전에서 적선 8척을 물리쳤다. 이어 벽파진으로 진을 옮긴 이순신은 9월 7일 침입해 온 적선 13척을 물리쳤다. 이 적선들은 남원성전투에 참전했던 일본 수군이 남원성을 함락시킨 후 서해안쪽으로 서진하기 위해 오던 중 선발대가 조선 수군과 조우한 것이었다.

수백 척의 적선이 몰려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은 휘하 수군들을 독려하여 1597년 9월 16일 명량수로에서 적선 130여 척을 맞아 31척을 분멸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명량해전 승리 이후 조선 수군은 고군산도까지 북상하여 얼마간 휴식을 취한 후 남하하여 고하도에 주둔하였다. 고하도에서 106일간 유진하면서 전선 40척을 건조한 이순신은 1598년 2월 17일 고금도로 이진하였다. 고금도에서도 수군력 증강노력을 다한 이순신은 결국 60여 척의 전선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명나라에서는 칠천량해전 패전 이후 수군 파견을 공식화한 후 1598년 7월 16일에 진린이 이끈 명 수군 본대가 고금도 조선 수군 진영에 합류하였다. 이후 7월 19일에 있었던 절이도해전에서 최초의 조명연합작전을 수행하면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어서 당시 사로병진작전에 따라 명 수군과 함께 예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을 9월 20일부터 10월 3일까지 6차례에 걸쳐 수륙합동으로 공격하는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 작전은 명나라 서로군 대장 유정제독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흥양 나로도에 물러나 전열을 정비한 조선 수군은 마침 일본의 괴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소식과 함께 일본군의 철수 정보를 입수한 후 묘도 쪽으로 진출하였다. 일본군에 대한 해상포위망을 구축한 조명 수군은 그들의 구원군이 사천 쪽에서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요격하기 위해 노량으로 진출하였다.

1598년 11월 19일 새벽 2시경부터 전투가 벌어졌다. 명 수군은 노량수로의 좌단 북쪽에 포진하고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은 노량수로 좌단 아래쪽부터 관음포쪽으로 포진한 가운데 전투를 벌였다. 조명수군은 풍상 쪽에 위치를 선점한 가운데 화공전을 펼쳐 일본군선 300여 척을 크게 물리쳤다. 관음포에 몰린 일본군이 최후의 항전을 하던 아침 동틀 무렵 이순신은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후 정오 무렵까지 지속된 전투 결과 일본군선 200척이 분멸되고 50여 척만 겨우 도주하였다. 임진왜란 전투 중 가장 큰 전과를 거둔 노량해전의 승리와 함께 이순신의 54년간 일생도 숭고하게 마침표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