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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시작~정읍현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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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급 무관시절

이순신이 1576년(선조9) 봄에 과거에 급제했지만 그 해 12월이 되도록 발령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주위의 사람들이 뇌물이나 권력자에게 손을 써 보라는 건의를 하였다. 그 때 이순신은 다음의 한마디로 이를 일축하였다.

사나이 대장부로 세상에 나서 나라에서 쓰여지면 죽기를 각오하고 충성을 다할 것이요, 쓰여지지 않는다면 농사짓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위의 문구는 이순신의 공직관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으로 이후의 공직생활에서 그는 이러한 원칙을 철저히 준수해 나갔다.

그 해 12월, 이순신이 첫 부임지로 발령을 받은 곳은 함경도 삼수 고을의 동구비보(童仇非堡) 권관(權管) 직이었다. 삼수와 갑산은 일등 귀양지로 평가되는 척박한 오지로써 근무여건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이순신은 맡은바 소임을 훌륭히 수행하여 당시 곤장 감사로 소문난 함경감사 이후백(李後白)으로부터도 칭송을 받았다.

만 2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35세 2월에는 훈련원 봉사(종8품) 생활을 하였다. 훈련원이란 당시 병조의 산하기관으로 군사들의 인사, 고시, 훈련, 교육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곳으로 이순신은 주로 군사들의 인사 관련 업무를 맡은 장무관이었다. 어느 날 상관인 병조정랑(정5품) 서익(徐益)이 정9품인 자기의 친지 한 사람을 순서를 뛰어 넘어 참군(參軍:종7품)으로 진급시키려고 하니 서류를 작성해 오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순서를 지키지 않으면 진급할 사람이 못하게 되므로 이는 공정한 것이 못된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이에 서익은 매우 불쾌해 하였는데,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주변 사람들은 이순신의 앞날을 걱정하였다. 반면에 당시 병조판서였던 김귀영(金貴榮)은 공의 패기 있는 언행에 감동하여 이순신에게 자신의 서녀(庶女)를 첩으로 보내려고 하였는데, 이순신은 “권세 있는 집안에 의탁하여 출세를 도모하는 것은 사나이가 취할 바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매파를 돌려보냈다.

이순신은 35세 되던 해 10월에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전출되어 충청도 해미에서 근무하게 되는데, 여기서도 항상 청렴한 생활을 하여 방에는 이부자리와 옷가지 외에는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군관으로 근무하다보니 출장이 잦았는데, 출장비로 사용하다 남은 것은 항상 반납을 철저히 하였다. 이순신의 나이 36세이던 1580년(선조 13) 7월에 최초로 수군생활을 하는데, 바로 전라 좌수영 관하의 발포(전남 고흥군 도화면 내발리) 수군만호(종4품) 직이었다. 수군만호는 오늘날의 해군 중·대령급으로 당시 직급 상 무려 6계급이나 진급을 하니 많은 사람들이 험담을 하였고, 감사에게 투서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당시 전라감사였던 손식(孫軾)은 이순신을 불러 만호 직을 수행할 수 있는지 실력을 테스트 해 보았다. 그리하여 진서 강독과 학진도를 그리라는 명령에 이순신이 능숙한 솜씨로 응하자, 나라의 동량을 해칠 뻔 했다면서 오히려 칭찬을 하였다.

그런데 당시 이순신의 직속상관은 좌수사 성박(成?)이었다. 어느 날 성박은 발포 객사 앞에 있는 오동나무로 거문고를 만들고자 부하를 시켜 베어 오도록 하였는데, 이순신은 “나라의 물건을 사사로이 사용할 수 없을뿐더러, 수십 년 간 자란 오동나무를 하루아침에 베어버릴 수는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오늘날 공직사회의 상관과 부하와의 관계를 감안해 보면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는 굳건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성박의 후임으로 이용(李庸戈)이라는 사람이 수사로 부임하였는데, 고분고분하지 않은 이순신을 벌 줄 목적으로 좌수영 관하 5개 포구에 대한 불시 순찰을 하여 결석자 현황을 조사한 후, 사실과 다르게 발포진만 결석자가 많은 것으로 전라감영에 보고했다. 이순신은 이 사실을 미리 파악하여 다른 포구의 결석자 현황을 정확히 조사하여 따로 보고서를 올리려고 하자, 놀란 다른 진 장령(將領)들이 수사에게 건의하여 보고를 철회하였다.

이순신이 발포에 근무한지 2년이 되어갈 무렵인 38세 되던 해(1582, 선조 15) 3월, 과거 훈련원 시절 상관이었던 서익이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의 신분으로 발포를 방문하였다. 군기경차관이란 군기와 관련된 분야를 특명으로 지방에 파견하여 실무를 검사케 하던 벼슬로 흔히 오늘날 합참의 전비태세검열단장에 비유된다. 서익은 도착하자마자 과거의 앙심을 드러내 다짜고짜 “발포 만호 이순신은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으므로 파직하여야 한다.”고 보고서를 올려 이순신은 억울하게 파직되고 말았다.

이순신은 그 해 여름에 복직이 되어 계급이 강등된 채 훈련원 봉사(종8품)로 근무하였다. 이순신은 항상 틈만 나면 활 쏘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함께 활을 쏘던 정승 유전(柳琠)이 이순신의 전통(箭筒)을 탐내어 상납을 은근히 요구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전통을 대감께 드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나, 다만 전통 하나 때문에 대감과 제가 더러운 말을 들을까봐 두렵습니다.”라고 하면서 완곡히 거절하였다. 이에 유전도 “그대 말이 옳다.”라고 하면서 오히려 칭송하였다. 이순신이 갖고 있던 전통은 장인 방진이 물려준 것이었다.

또한 당시 같은 문중의 이율곡이 이조판서였는데, 주위에서 이순신에게 만나보라고 권유했지만, 이순신은 “그가 이조판서로 있는 동안에는 만나보는 것이 옳지 못하다.”라고 하면서 거절하기도 하였다. 이순신은 인사권을 가진 율곡을 만날 경우 오해를 살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순신이 39세 되던 해 7월에 남병사 이용의 군관으로 근무하다가 그 해 10월에 함북 두만강 변의 경원군 관내에 있는 건원보(乾原堡) 권관으로 보직되었다. 이 지역은 여진족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근무기간 중 유인 작전을 써서 오랑캐 두목 울지내(鬱只乃)를 사로잡는 큰 공을 세웠다. 그래서 조정에서 큰 상을 내리려고 했지만 당시 북병사 김우서(金禹瑞)는 자기에게 미리 보고하지 않고 작전을 수행했다는 이유를 들어 오히려 벌을 줘야 한다는 보고를 하였다. 이 때문에 이순신은 정기 승급인 훈련원 참군(종7품)으로 승진하는 데 그쳤다.

그 해 11월 15일에 부친 정(貞)이 사망했다(향년 73세). 이순신은 이 부음을 이듬해 1월에 듣곤 즉시 고향으로 달려갔는데, 당시 함경도 순찰사였던 우찬성 정언신(鄭彦信)이 그의 몸을 걱정하여 뒤를 보살펴 주도록 지시하였다고 한다. 한편 1월 16일에는 율곡 이이(李珥)도 사망했는데, 이순신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점에 대하여 매우 애석해 하였다.

첫 번째 백의종군

백의종군 삽화

▲ 백의종군 삽화

만 2년 동안의 상을 치르고 42세 1월에 사복시(司僕寺, 궁중의 마거(馬車)에 관한 일을 맡은 관청)의 주부(종6품)로 임용되었다가 16일 만에 함경도 조산보(造山堡) 만호(경흥고을 : 종4품)에 부임하였는데, 이는 유성룡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조산보는 두만강 하구 어귀에 위치하였고, 당시 함경도 수군진 3개소 중 북도에 유일한 수군진이었다. 이순신은 발포에 이어 두 번째로 수군직을 맡은 것이었다. 1년 후인 43세 되던 해(1587년, 선조 20년) 8월엔 두만강 하구 녹둔도(鹿屯島)의 둔전관(屯田官)을 겸직했다. 둔전은 관과 민이 합력하여 미개간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은 후 소출을 배메기하는 제도이다. 녹둔도는 비옥한 땅이라 1583년에 함경도 감사 정언신이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하여 둔전을 설치하여 운영해 왔는데, 추수 때가 되면 오랑캐의 침입이 잦은 곳이었다. 이순신은 녹둔도 둔전관을 겸직한 이후 녹둔도를 수비하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병력이 더 필요함을 북병사 이일(李鎰)에게 자주 건의했지만 묵살을 당했다.

마침내 그 해 9월 추수기에 오랑캐의 침입을 받아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당시 시전에 사는 콜간 우디캐족의 대추장 하오랑아가 내지의 우디캐족을 이끌고 갑자기 침략하여, 우리 군사 10여 명을 죽이고 농민 160여 명을 사로잡아 갔던 것이다. 이순신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오랑캐 진영으로 들어가 잡혀간 백성들을 60여 명이나 구출해 왔다. 그러나 워낙 큰 피해를 입었는지라 이순신은 책임을 안고 하옥이 되었는데, 특히 북병사 이일은 이순신을 죽이려고 죄를 시인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정당한 이유를 들어 이에 불복하자 옥에 가두고 모든 책임을 이순신의 것으로 조정에 보고하여 결국 이순신은 백의종군(白衣從軍)이라는 처벌을 받게 되었다. 여기서 백의종군이란 나라에서 주어진 일체의 관작과 보직을 박탈당한 채 평복으로 군에 종군하는 것을 말한다. 이순신은 일생동안 2번의 백의종군을 하는데 첫 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된 것이다. 백의종군 중이던 44세 되던 1588년 1월에 있은 시전부락(時錢部落 : 두만강 건너편의 오랑캐들의 근거지) 전투에서 이순신은 우화열장(右火烈將)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백의종군은 사면 받은 채 고향에 낙향하였다.

정읍현감 시절

한편 당시에는 불차탁용이라는 인재 충원제도가 있었다. 이는 일정한 차례를 따지지 않고 뽑아 쓸만한 사람을 비변사의 관료가 천거할 경우 그 순위에 따라 인재를 등용시키는 제도였다. 이 제도에 의해 이순신은 천거 순위 제 3위로 뽑혀 등용되었다. 그리하여 낙향한 지 10개월 만인 45세되던 해 2월(1589년)에 전라도 감사 이광(李洸)의 특청으로 군관 겸 전라도 조방장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다 그 해 11월에 군관 겸 선전관(전령, 출납 등)으로 일시 한성에 근무하다가 45세되던 해 12월에 정읍 현감직에 제수되었다.

정읍현감에 보직된 이순신은 처음으로 군사진의 지휘관이 아닌 지방행정 조직의 수장이 되자 그동안 떨어져 살았던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정읍현에서 함께 살았다. 이때 이순신의 두 형이 일찍 작고하였으므로 조카들을 비롯하여 약 40명에 달하는 많은 가족을 부양하게 되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남솔이라고 비판하자,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식구를 많이 데리고 온 죄를 지을지언정 이 의지할 데 없는 것들을 버리지는 차마 못하겠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아들들보다 조카를 더 귀중히 여겼다.

이순신은 정읍현감직에 부임하자마자 인근 태인현감직을 겸직하였다. 태인현은 오랫동안 원이 없어서 공문 서류가 쌓여 있었는데, 이순신은 척척 판결을 내려 신속하게 처리를 하니 그곳 백성들이 둘러서서 듣고 또 옆에서 보다가 탄복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하여 어사에게 청하여 이순신을 태인현감으로 보직해 주도록 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이순신은 정읍현감과 태인현감직을 수행하면서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결국 이순신이 임진왜란 시기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민본 이념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