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의 생애

  • 탄생부터 무과합격까지
  • 무관시작~정읍현감까지지
  • 임진왜란 시기의 활동
  • 이순신 사후의 인식
  • 이순신연보

탄생부터 무과합격까지

  • HOME
  • 충무공의 생애
  • 탄생부터 무과합격까지

집안의 내력

충무공 이순신 옛 집안터

▲ 충무공 이순신 옛 집안터

충무공 이순신의 가문인 덕수 이씨 가계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된다. 3세조 소(劭)는 고려 고종 때 남성시(南省試)에 급제하여 전법판서(典法判書), 지삼사사(知三司事), 세자내직랑을 역임했다. 4세조 윤번(允蕃)도 문과에 급제하여 도사(都事)를 역임했다. 5세조 현(玄)은 벼슬이 없었으며, 6세조 공진(公晉)은 수사재시사(守司宰寺事)를 지냈는데, 이는 사재시에서 근무했던 잡직장교였다. 이상 6세조까지 고려시대 선조들을 살펴보면, 1세와 2세는 무관직, 3세와 4세는 문과에 급제한 문관이었다. 그러다 5세에서는 벼슬이 없고 6세에서 무관으로 진출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이순신의 선조는 무반에서 시작하여 문반과 무반을 교차하다가 고려 말기에는 한미한 무반이 되는 부침을 겪었다.


조선조에 이르러서 이순신의 가문은 일시적으로 현달한 가문이 되었다. 7세조 변(邊)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중추부사와 예문관대제학 등 정2품에까지 이르렀는데,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었다. 8세조 효조(孝祖)는 정4품 통례원 봉례(奉禮)를 역임했다. 9세조는 이름이 거(琚)이고 자는 자미(子美)인데, 1480년(성종 11) 식년 문과 을과 6위에 급제했다. 벼슬은 설경(說經)으로 시작하여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이조 좌랑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면서 엄격한 탄핵과 간쟁을 서슴지 않아 ‘호랑이 장령’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한 고전에 해박하고 율문(律文)과 중국어에도 뛰어나 임금의 묘호(廟號)를 정하거나 국가적인 제사의식에 대한 전거를 밝히고, 사율원(司律院)의 율관을 교습하는 일 등을 담당하였다. 조부인 백록(百祿)은 1534년(중종 29) 성균관 생원이었으나 음직(蔭職)으로 중종 말년에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를 지냈다. 그는 중종의 승하일에 아들의 결혼식을 올릴 때 사돈댁에서 주육설판을 벌이는 바람에 이와 연루되어 고초를 겪은 후부터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다.


충무공 이순신 어린시절 삽화

▲ 충무공 이순신 어린시절 삽화

이순신의 부친 정(貞)은 병절교위라는 명예직의 하급 무관벼슬을 받기도 했으나, 부친(백록)의 불우한 말년을 목격하고 정치에 대한 환멸을 느껴 일찌감치 벼슬을 단념했다. 그러므로 명색만 양반일 뿐 평민과 다름없는 처지로 집안이 상당히 가난했다. 그는 아들 4형제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의 이름을 모두 고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성군(聖君)의 이름을 따서 첫째를 희신(羲臣), 둘째를 요신(堯臣), 셋째를 순신(舜臣), 넷째를 우신(禹臣)으로 지었다. 요컨대 항렬자인 ‘신(臣)’ 자를 돌림으로 하고, 중국 고대의 훌륭한 임금 순(舜)의 이름을 따 ‘순신(舜臣)’ 이라 지었다. 맏형은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복희씨(卜羲氏)를 본떠 ‘희신(羲臣)’이라 하였고, 둘째형은 삼대(三代)의 요(堯)를 본받으라는 뜻에서 ‘요신(堯臣)’이라 지었으며, 동생은 우(禹) 임금을 따 ‘우신(禹臣)’ 이라 지었다.

이것의 의미는 항렬자 신(臣)을 사용하되,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임금의 신하가 되라는 기대를 반영한 것이었다. 희신은 중국 전설상의 임금으로 삼황오제 중에서도 수위에 있는 존재로서 팔괘를 만들어 인류 문명의 시원을 연 복희(伏羲)의 ‘희’자를 딴 이름이다.


요신순신우신 역시 고대 중국 왕조의 천자 이름을 따온 것이다. 특히 오제 중의 두 사람인 요와 순이 통치하던 시대는 ‘요순지치’라 하여 유가(儒家)에서는 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이상사회로 그려지고 있다. 유가에서 요 임금은 자연의 원리를 파악하는 지혜를 가졌기에 천자가 된 성군으로 그려졌다. 순 임금은 효·부부애·우애 등 가족애를 실천하여 가정의 화목을 달성했기에 천자가 된 성군으로 그려졌다. 그리고 순 다음의 임금인 우 임금은 치수(治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성군으로 그려졌다. 요컨대 복희·요·순·우 등의 성군은 유가문명의 시작과 완성을 이룩한 성인으로 추앙을 받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관례(冠禮)를 치르면 서로 호칭할 때 이름보다 흔히 자(字)를 썼다. 이순신의 자는 여해(汝諧)로 이것 역시 중국 오경 중의 하나인《서경(書經)》에서 따왔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이상적인 세대는 요(堯)순(舜)우(禹)의 삼대였다. 순 임금은 관직을 정비하여 신하들의 능력에 알맞게 각각 임명하면서 말하기를 “좋도다! 가서 서로 협력하여 일하라.[兪!往哉汝諧] ”라고 하였다. 순 임금은 신하인 우(禹)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우는 이를 사양하고, 점을 치거나 하늘에 물어볼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순 임금은 점괘가 이미 좋게 나왔다고 하면서 “그러지 말라. 오직 너만이 조화롭게 할 수 있을 뿐이다.[毋!惟汝諧]”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 ‘여해’라는 자는 순 임금의 신하로서 ‘조화롭고 화목하게 정치를 펴라’는 의미였다. 이순신의 형제에 관한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아 희신·요신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들은 이순신과 함께 글을 읽었고,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요신은 과거에 합격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희신과 요신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30대부터 두 형 집안의 가장(家長)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슬하에 다섯 아들과 딸 셋을 두었는데, 이 중 셋째인 면(葂)은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해인 16세 때 아산 본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고, 서자인 훈(薰)은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중에, 신(藎)은 정묘호란 중에 전사하였다. 후세에 이순신과 그의 아들 면·훈·신, 조카 완 등 출중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아산 백암골에 정려(旌閭)를 세웠는데, 이를 덕수 이씨 가문에서는 ‘5세 7충 2효’라 부르고 있다.

이순신의 탄생과 성장

이순신은 조선 인종 원년(1545) 3월 8일(당시 양력 4월 28일)에 한성 건천동(乾川洞)에서 태어났다. 건천동은 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 1가 부근으로 당시에는 장안의 변두리에 해당하는 가난하고 한적한 동네였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지은 〈행록(行錄)〉에는 이순신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어머니 변씨가 이순신을 낳을 때 시아버지인 백록이 꿈에 나타나 “그 아이는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이라 하라”고 일렀다는 것이다. 또 이순신이 태어났을 때 점장이가 찾아와 “이 아이는 50세가 되면 북방의 대장이 될 것이오.”라고 일러 주었다고도 한다. 이러한 일화들로 보아 이순신은 태어날 때부터 주위의 어른들로부터 많은 기대와 관심을 받았던 것 같다. 이순신의 유년 시절은 여느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쓴 〈행록〉에 따르면, ‘소년 순신은 어릴 적 이웃 아이들과 더불어 항상 전쟁놀이를 즐겼고, 그때마다 아이들은 순신을 대장으로 삼았다고 한다. 순신은 늘 활과 화살을 지니고 다녔으며, 마을의 어른이라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즉시 화살을 겨누는 통에 마을 사람들은 두렵게 여겨 그의 집 앞을 지나다니기를 꺼렸다’고 한다. 한편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均)은《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나의 친가는 건천동에 있는데 청녕공주(靑寧公主)댁 뒤부터 본방교(本房橋)까지 겨우 34집으로 조선 이래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 근세 인물로는 유성룡, 나의 형[허성(許筬)으로 추측됨], 이순신, 원균 등이 일시에 이곳에서 태어났다.

다시 말해 임진왜란 당시 명상(名相)으로 조선 정국을 주도하던 유성룡(柳成龍, 1542~1607), 명나라와의 외교에 공이 컸던 허성(許筬, 1548~1612), 이순신과 함께 수군으로 활약한 원균(元均, 1540~1597) 등이 같은 동네 출신이라는 것이다. 후에 선조에게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은 유성룡이다. 선조는 유성룡에게 이순신이 어떤 인물이냐고 묻자, 유성룡은 이렇게 답하였다. “이순신은 한 동네 사람이어서 신이 어려서부터 아는데, 직무를 잘 수행할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평소에 대장이 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또 성품이 강인하고 굳세어 남에게 굽힐 줄 모릅니다. ”이 말은 유성룡이 어렸을 적부터 이순신과 교분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원균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다. 이순신과 이들의 나이 차이는 원균이 다섯 살, 유성룡이 세 살 연상이고, 허성은 세 살 연하였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많지 않던 가산도 거의 탕진되고 골치 아픈 서울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이 정은 가족들을 이끌고 충남 아산 송곡리로 이주하는데, 이때 이순신의 나이는 정확하게 알려지고 있지 않으나 대략 12세 전후가 될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유성룡이 고향 안동에서 서울로 올라온 시기가 13세 때였으므로 3살 연하인 이순신의 나이 10세에 유성룡과 만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일 유성룡과의 친분을 고려해 볼 때 두 사람이 적어도 2년간은 서울에서 같이 살며 교제를 나누었을 것으로 보아 이순신은 아마도 12세 전후에 아산으로 이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산 송곡리는 이순신의 모친 변씨의 친정 마을이었다. 아산으로 이사한 후 이순신은 사대부 가문의 가풍을 따라 글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의 문학적 자질은 임진왜란 중에 쓴 《난중일기(亂中日記)》와 그 밖의 여러 시문 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21세를 전후하여 이순신은 혼인을 하였다. 아내 방씨는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딸이었다. 방씨는 현숙하고 영리한 부인이었다. 혼인할 때 방씨의 나이는 19세였는데, 다음의 기록을 볼 때 방씨의 현명함을 짐작할 수 있다.

방씨가 시집오기 전 어느 날, 도둑들이 그녀의 집 안마당으로 들어왔다. 방씨의 아버지는 도둑에게 활을 쏘다가 화살이 떨어지자 화살을 어서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도둑들은 그 집의 계집종들과 미리 내통하여 집안의 화살을 모두 없애버린 뒤였다. 이때 방씨는 침착하게 “아버님, 여기 있습니다.” 하고 급히 다락에서 베를 짤 때 사용하는 대가지를 한아름 안아다가 방바닥으로 던졌다. 그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화살을 다발 째 내려놓는 듯하였다.

방씨의 아버지는 본래 활을 잘 쏘기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것을 두려워했던 도둑들은 화살이 아직도 많이 있는 줄 알고 그만 꽁지가 빠지게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방씨의 순발력 있는 기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방씨와 혼인한 후 이순신은 무관 출신인 장인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붓을 던지고 22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활을 잡고 무인이 되려 했다.

무과에 급제하다

이순신이 무과를 준비한 동기는 본인의 야망과 무관출신인 장인 방진의 권유가 어우러져 무관의 길을 택했다고 본다. 무예에 입문한지 6년 후인 28세 때인 1572년(선조 5) 훈련원 별과 시험에 응시했지만 낙마(落馬)로 인해 낙방하였다. 잘 알려진 사실이긴 하지만 당시의 사실을 아래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 어린시절 낙마 삽화

▲ 충무공 이순신 어린시절 낙마 삽화

겨울에 비로소 무예를 배웠는데, 팔심과 말 타고 활쏘기에 동료들로서 아무도 따를 자가 없었고 공의 성품이 높고 늠름하여 같이 있는 무사들이 종일 농하는 말로 서로 희롱하면서도 공에게 대해서만은 감히 너 나 하지도 못하고 언제나 높이고 공경하였다. 가을에 훈련원 별과 시험을 볼 적에 말을 달리다가 말이 거꾸러지자 공이 떨어져 왼편 다리뼈가 부러지니 보는 사람들은 공이 죽었다고들 하였는데, 공이 한쪽 발로 일어서서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겨 싸매니 모두가 장하게 여기었다.

첫 번째 기록에서 보이듯이 이순신은 무예를 배우는 데에도 남보다 열심이었고 또 성실하였다. 그의 성품은 동료 무사들에게 ‘높고 늠름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두 번째 기록에 나타난 바와 같이 낙마로 인해 무과에 불합격 했다는 사실은 이순신이 무예에 입문한 시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늦어 실력이 썩 뛰어났다고 보기 어려웠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그는 낙마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감투정신을 보여 주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576년(선조 9) 32세 때 봄에 식년(式年) 무과 시험에 응시하여 병과 4등으로 합격하였다. 당시 무과 합격자는 모두 29명을 뽑았는데, 성적순에 따라 갑과 3, 을과 5, 병과 21명으로서 이순신은 병과 4등이었기 때문에 전체 12등의 성적으로 합격한 것이다. 특히 다음의 일화를 통해 볼 때 이순신은 다른 분야보다도 병법분야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경을 외우는 데 다 통하였는데, 황석공(黃石公) 소해(素害)를 강(講)하다가 시험관이 “장량(張良)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라가 놀았다 하였으니 장량이 과연 죽지 않았을까?”하고 묻자 “사람이 나면 반드시 죽는 것이요, 강목에도 ‘임자(壬子) 6년에 유후 장량이 죽었다’고 하였으니 어찌 신선을 따라가 죽지 않았을 리가 있습니까. 그것은 다만 가탁(假托)하여서 한 말이었을 따름입니다.”고 대답하니 시험관들이 서로 돌아보며 “이것은 무사(武士)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하면서 탄복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무과 학격 교지

▲ 충무공 이순신 무과 학격 교지

이를 통해 볼 때 이순신은 무과시험 과목 중 병법 분야에 탁월한 능력을 보유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이순신이 이러한 병법분야에 조예가 깊게 된 것은 어렸을 때부터 글공부를 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 기록된 당시 무인들이 병법을 소홀히 대하는 듯한 현상과 비교해 볼 때 이순신의 독특한 면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무예를 업으로 하는 자들은 비록 활 쏘고 말달리는 법은 익히고 있으나 병서는 읽지 않으니, 장수다운 인재가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어릴 때부터 글공부를 한 이순신은 병법서적을 섭렵하는 데 다른 무장들보다 유리했을 것이고, 병법에 탁월한 이순신이야 말로 다른 무인들과는 차별성을 가진 전략가로서의 기본자격을 갖춘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이순신이 무예에 입문한지 10년 만에 장원급제도 아닌 중상(中上)의 성적으로 합격한 사실은 그가 결코 뛰어난 천재가 아니며, 부단히 노력하는 인물임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할 것이다.